유럽축구 등 세계 스포츠계에 공 들인 푸틴
스포츠를 '민족주의적 도구' '권력화'로 집중
러시아 소유 가스회사, UEFA 후원사로 지원뒤에선 국제사회 에너지 공급 통제하려 계획두 차례 올림픽 이후 전쟁 도발...IOC, FIFA 무시그럼에도 올림픽, 월드컵 개최권 받은 러시아"스포츠는 중립 유지할 수 없다"...스포츠계 반발
요새 유럽 축구 그라운드는 자주 눈물 바다가 된다.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 출신 선수들을 통해서다. 13일(현지시간)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웨스트햄과 아스톤 빌라의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선발로 출전한 안드리 야르몰렌코(웨스트햄)는 선제골을 넣은 직후 무릎을 꿇으며 희생된 자국민을 추모하는 세리머니를 했다.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야르몰렌코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간 팀 훈련조차 불가능하다며 경기를 뛸 수 없었던 그는, 복귀한 첫 경기에서 득점하며 팀을 2대 1로 승리하는 데 견인했다.
포르투갈리그에서도 가슴 찡한 장면이 연출됐다. 지난달 27일 벤피카와 비토리아의 경기 후반 로만 야렘추크(벤피카)가 교체 투입되자 관중들은 기립 박수로 환영했다. 벤피카의 주장 얀 베르통언은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팔에 있던 주장 완장을 건넸다. 팬들은 더 큰 박수로 야렘추크를 응원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던 그도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유럽 축구계에 전 세계인들의 눈과 귀가 쏠려있다. 각 나라 리그가 한창인데다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까지 있어 관심이 극에 달해 있다. 여기에 러시아 침략 이후 유럽축구연맹(UEFA)의 신속한 '탈(脫)러시아' 조치도 한몫했다. UEFA는 러시아 침공 하루 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파리로 옮기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러시아의 국영기업인 가스회사 가스프롬(Gazprom)을 후원사에서 제외하는 등 러시아를 고립시키며 빠르게 대응했다.
UEFA는 세계 스포츠계가 러시아와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푸틴)에 '손절'하고 고립시키도록 '단체 행동'에 나서는 데 선봉자 역할을 했다. 유럽 축구계에 집중해왔던 푸틴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꼴이 됐다.
이를 시작으로 국제축구연맹(FIFA),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러시아를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사실상 고립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가장 '비(非)정치적'이라는 스포츠계가 정치적으로 도발한 푸틴과 러시아에 침묵하지 않고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다.
'맨몸 수영' '광야 승마' 푸틴...'스포츠 권력화' 작업의 시작
세계 스포츠계의 '탈러시아' 과정을 보면 그동안 푸틴이 스포츠계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얀 도복을 입고 자주 카메라 앞에 섰던 '유도광' 푸틴은 국제유도연맹(IJF)에서 명예 회장과 대사를 겸직하고 단증(명예 8단)까지 받았다. 유도계에서 그의 입지가 어땠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발자취다.
그러나 IJF는 푸틴에 수여했던 모든 직위를 박탈했다. 사실 IJF는 관련 자격을 '정지' 한다고 했다가 비난이 폭주하자 '박탈'이라는 카드로 바꿔 들었다. 그러더니 5월 예정됐던 대회까지 취소했다. 연맹도 이래저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수영과 태권도연맹도 푸틴과 손절했다. 물에서 '맨몸 수영'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유도에 이어 태권도까지 섭렵한 푸틴은 이들 연맹과도 끈끈한 연을 이어왔다. 그러나 국제수영연맹은 그에게 수여했던 훈장을, 세계태권도연맹(총재 조정원)도 그에게 줬던 단증(명예 9단)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IOC도 푸틴에게 수여했던 '올림픽 훈장'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국제 대회에서 사실상 러시아를 퇴출하는 동시에 그가 갖고 있던 명예까지 박탈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푸틴하면 '만능 스포츠맨' 이미지가 떠오른다. 축구와 아이스하키, 유도, 수영, 승마 등을 즐기는 모습은 그를 건강하게, 그리고 러시아를 막강하게 보이도록 하는 착시현상을 만들었다. 역사 속 독재자들에게 보여지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실 푸틴은 2000년 집권했을 때부터 스포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그가 크렘린궁에 첫 입성했을 때 한 일이 자신의 전 유도 코치를 초대하는 것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포츠 기량을 뽐내기도 했다. 러시아 및 스포츠 지정학 전문가인 루카스 오뱅 프랑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RIS) 부연구원은 최근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에서 "푸틴은 자신의 이미지를 세심하게 선별해 관찰자들이 그의 스포츠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스포츠를 권력의 한 요소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틴은 과두정치의 집권층이나 정치인, 전직 운동선수 등을 동원해 이른바 '빅 스포츠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러한 작업은 '소프트 파워'로 작용, 러시아에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오뱅 부연구원은 "이 거대한 시스템은 스포츠 세계에서 러시아의 아름다운 그림을 창조하기 위해 필요했고, 그것은 푸틴에 의해 추진됐다"고 강조했다.
과도한 '민족주의적 도구'로 쓰인 스포츠...도핑 파문으로
푸틴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최근 베라 톨츠 영국 맨체스터대의 러시아 연구교수는 CNN에 "푸틴이 집권한 이후 정권을 정당화하는 방법으로 러시아 민족주의를 도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스포츠가 정권에 대한 국민의 충성심을 구축하는 도구로 집중적으로 활용됐던 구 소련 시대처럼 말이다.
이것의 부작용이 러시아가 국가 주도적으로 관리한 도핑 프로그램으로 발현됐다. 국제 스포츠에서 각 나라를 상대해 승리하고, 더 많은 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도핑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 "푸틴의 대중 동원 전략의 핵심"이란 걸 보여준다고 톨츠 교수는 전했다.
2016년 '맥라렌 보고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스포츠 도핑 행태를 폭로했다.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가 2011~2013년 국제 대회에 출전한 러시아 선수 1,000여 명의 도핑 결과 조작에 관여했다는 내용이었다. 2019년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이를 근거로 러시아를 도핑 규정 위반으로 올림픽과 월드컵 등 주요 국제 스포츠 대회에 4년 동안 출전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2020년 러시아 체육부가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이의를 제기해 징계가 완화됐다.
당시 러시아의 도핑 은폐를 폭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 변호사 짐 월든은 스포츠계가 교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러시아를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가시킬 때마다 당신은 기본적으로 식인 상어들과 수영하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며 "그들은 당신의 선수들을 속일 것이고 그들은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푸틴의 위험한 스포츠 철학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월든 변호사는 "푸틴은 스포츠에 대한 통제력을 이용해 전 세계를 상대로 게임을 하고, 가능한 한 많은 승리를 거두려 한다"며 "러시아 국민들을 위한 콘텐츠(승리)를 선별해 자신이 최고의 인기를 얻을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이어 "푸틴은 스포츠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결국 국가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힘의 논리로 해석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유럽축구계 공들인 푸틴...'스포츠 워싱' 이름으로
푸틴의 러시아는 유독 유럽축구에 공들여왔다. 특히 기업을 앞세워 UEFA 혹은 유럽 축구 구단과 계약을 맺고 막대한 자금을 댔다. 러시아 정부가 소유한 세계 최대 천연가스 생산업체 가스프롬은 2013년부터 UEFA의 후원사가 됐고, UEFA는 2024년까지 계약을 연장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몰론 UEFA가 가스프롬의 후원사 자격을 박탈하며 4,000만 달러(약 485억 원)의 계약도 파기했다.
일각에서는 푸틴 정부가 가스프롬을 이용해 '스포츠 워싱' 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유럽축구계에 후원자로 나선 가스프롬이 푸틴의 러시아를 위해 '두 얼굴'로 활동했다는 것. 이 기업은 UEFA의 수익 증대에 기여하고 챔피언스리그의 특징으로 자리잡았지만 뒤에서 더 은밀한 활동에 관여해왔다.
비영리 독립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따르면,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 폴란드가 러시아의 유럽 가스 공급에 영향을 미치거나 통제하지 못하도록 발트해 해저에 있는 가스프롬의 공급 파이프 라인을 독일로 연결했다. 동시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영토를 넘지 않음으로써 두 나라에 값비싼 가스 공급 운송료를 지불하는 것을 피했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2000년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가스프롬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추진했다. 이는 가스프롬을 통해 국제사회에 에너지 공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크렘린궁의 은밀한 전략 때문이었다. 앞에선 유럽축구를 후원하며 돈을 대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뒤로는 딴 주머니를 차며 이웃나라들을 기만했던 것이다.
FIFA와 IOC의 러시아 징계...그 속내는?
"당신은 푸틴에게 받은 '우정의 메달'을 반환할 생각이 있습니까?"
지난달 4일(현지시간)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기자들로부터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열린 화상 기자회견 자리였다. 각국 기자들은 '2018년 월드컵 개최를 푸틴에게 허락한 걸 후회하지 않는가' '스포츠가 푸틴을 대담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것인가' 등의 날선 질문들이 쏟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FIFA는 러시아 침략뿐만 아니라 푸틴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유럽 예선 경기가 한창인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인판티노 회장은 푸틴에 대한 언급은 고사하고 우정의 메달에 관한 대답도 회피했다. 그가 내놓은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동문서답뿐. "저는 스포츠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FIFA는 러시아에 대해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흘 후에야 러시아에 국제 경기 개최 및 국가명, 국기, 국가 사용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그야말로 '솜방망이' 징계였다.
그러자 FIFA를 향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신속하게 '탈러시아' 선언을 한 UEFA와 비교됐다. UEFA는 후원사 가스프롬을 퇴출시키고 5월 챔피언리그 결승전 장소도 즉각 변경했다. 카타르 월드컵 최종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러시아와 대결을 앞둔 폴란드, 스웨덴, 체코 등은 '보이콧'을 표명한 상태였다. 누가봐도 FIFA의 징계는 어처구니없는 처사였다.
이러한 비난 세례는 IOC도 피하지 못했다. IOC는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러시아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신속하게 '러시아 퇴출'을 선언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2022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이 곧바로 직격탄을 맞았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는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단에 '중립국 선수 자격'으로 출전을 허용하겠다"는 소극적인 발표를 했고, 보다못한 각국 선수들이 한목소리를 내며 저항했다. 전현직 올림픽·패럴림픽 선수들과 선수협회 등이 IPC에 강력한 입장을 취하도록 힘을 보탰다. IPC는 그제서야 입장을 번복해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이 이번 패럴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IOC는 러시아 침공으로 성명을 발표한 후 닷새가 지나서야 종목별 국제연맹(IF)과 각종 대회 조직위원회에 러시아 제재를 '권고'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단의 국제대회 초청 또는 참가를 불허하라는 조치였다. 그러나 양국 선수나 관계자들이 국제 스포츠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뒀다. 국가명, 국기, 국가 등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고, 중립 소속으로만 참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더 이상 스포츠는 중립적이지 않다...그저 정치적일 뿐"
FIFA와 IOC는 현대 스포츠의 메가 이벤트를 이끌고 있지만 러시아와 푸틴에겐 이상하리만큼 관대했다. 푸틴의 러시아가 전쟁 도발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개막식에 맞춰 옛 명칭 그루지야인 조지아를 침공해 분쟁을 촉발했다.
베이징 올림픽을 이용해 전 세계의 관심을 분산시키려 했던 것인데 당시 IOC는 올림픽 기간 휴전을 위반한 러시아를 제재는커녕 옹호하기 바빴다. 심지어 IOC 대변인은 올림픽에 참가한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존재가 "올림픽 정신과 올림픽의 가치"를 반영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폈다.
IOC의 안일한 처사는 푸틴을 또다시 도발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자국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 직후 크림반도를 침공해 장악해 버렸다. 러시아를 향한 IOC의 관용이 푸틴에게 올림픽 전후 전쟁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셈이다. 그러나 IOC는 이번에도 러시아 제재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FIFA라고 다르지 않다. FIFA는 이미 교전 국가에 대해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FIFA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 독일과 일본을 참가시키지 않았다. FIFA는 또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월드컵에서 제외시켰고, 발칸반도 전쟁 중에 유고슬라비아를 1994년 토너먼트 예선에서 배제시켰다.
그러나 FIFA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게 즉각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심지어 6년의 사이를 두고 올림픽 전후에 두 차례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게 도리어 2018 월드컵 개최권을 쥐어줬다.
침략을 하고도 러시아에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권을 줬다는 건 모종의 은밀한 관계를 드러낸 셈이다. 마이클 페인 전 IOC 마케팅 책임자도 "IOC는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CNN에 밝혔을 정도다. 그나마 러시아와 푸틴을 빠르게 손절하고 고립시킨 국제 스포츠계 분위기가 FIFA와 IOC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스포츠계는 현재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IOC와 FIFA의 앞뒤 다른 이중적 행태를 비판하고, 현실에 맞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제는 스포츠에 정치적 손길이 미치지 않는다는 헛소리 대신, 스포츠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
노엘 르 그라에 프랑스축구연맹(FFF) 회장은 최근 프랑스 일간 르파리지앵과 인터뷰에서 "스포츠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긴장을 완화시킨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지금은 너무 멀리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포츠, 특히 축구의 세계는 중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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