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민주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인 지난 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한 말이다. 우크라이나군의 기대 이상의 선전을 상찬하고 푸틴의 러시아를 독재국가로 못 박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결속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이튿날 유엔총회에서 141대 5로 러시아 규탄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표면적으로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여론전 압승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묘하게 흐르고 있다. 인도의 친러 행보가 눈에 띈다. 인도는 ‘민주주의 파트너십’을 기치로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주도 안보협의체 쿼드의 회원국. 그러나 유엔의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도 기권했고 경제제재도 불참했다. 심지어 러시아 루블화와 자국 루피아화를 결제통화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까지 검토하고 있다. 인도를 지렛대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에는 딜레마다. 인도의 러시아산 방공 미사일 S-400 구매에 대해, 미 의회가 ‘이를 제재할 경우 중국 견제가 약화한다’며 묵인한 이유다. 최근 인도를 방문한 일본 기시다 총리가 51조 원 투자라는 선물보따리를 안겼지만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대화와 외교’만 강조했을 뿐 러시아에 대한 직접 비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러시아 제재에 뜨뜻미지근한 나라는 인도만이 아니다. 전통적 친미국가 중에서도 러시아 제재에 대해 발을 빼는 국가들이 나오고 있다. 경제제재에 불참한 이스라엘이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모두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있고 역내 최대 적국인 시리아와 이란의 배후에 있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의식해서다. 1998년 서구 투자가들의 철수에 따른 외환위기 경험이 생생한 인도네시아도, 제재 대신 이란 핵합의를 되살리려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도 러시아 비난에 수위를 조절하며 ‘담장 앉아 있기(중립적 태도를 비유)’에 동참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보이는 세계 각국의 치열한 눈치작전은 30년 동안 슈퍼파워였던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상징한다. 러시아의 부도덕한 전쟁에 대한 비난과 별개로, 세계질서 변화기에 냉철한 외교전략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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