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이맘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고 청와대를 나서던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머릿속은 국정원 정치개입 흑역사를 근절시킨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찼다. 더 고민하고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취임식이 준비된 국정원으로 이동하는 중에 전화로 1호 지시를 긴급히 내려보냈다. “지금 이 시간부로 국내정보 담당관의 기관 출입을 전면 중지한다.” 그렇게 국내 파트의 활동을 정지시킨 상태에서 그는 국정원 정문을 통과했다.
되돌아보면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등에 비견할 만한 전광석화 같은 결단이었다. 집권 초기 아니면 질긴 악업을 끊을 수 없고, 완전하고 즉각적인 폐지가 아니면 언제든 개혁이 원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국정원 국내 파트 활동이 불가역적인 수준으로 폐지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지시도 전격적이었다. 졸지에 이삿짐을 싸게 된 국방부와 합참이 패닉에 빠졌을 정도다. 명분도 있었다. 청와대의 폐쇄적 구조가 대통령의 실패를 가져온다는 문제의식은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집권 초 확신에 찬 결단이라는 점에선 5년 전 국정원 개혁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용을 들춰보면 우려가 앞선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철저한 준비가 뒷받침되지 않은 결단은 혼선을 부르기 마련이다. 예상 못 한 반대에 부닥치면 조급해지고, 경로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해 독선에 빠지기도 쉽다. 용산 이전이 딱 그런 모습이다. 공청회, 토론회 한 번 없이 국가 중대 사안이 결정됐다. 청와대는 국가 위기관리 컨트롤타워이자 최고 전쟁사령부다. 그런 민감한 공간을 옮기는데 현재 권력과 협의 없이 당선인이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다.
위기대응과 안보 공백 우려는 밀실 결정의 필연적 후과다. 그런데도 인수위는 통의동 인수위 집무실을 임시로 사용하면 된다면서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리고 있다. 급기야 비상시 운용하는 국가지도통신차량이 있으니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종합병원 응급센터를 놔두고 앰뷸런스에서 환자를 보겠다는 격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국가의 안보를 책임질 예비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신구 대통령 회동이 성사되면서 용산 이전 예비비 갈등은 봉합이 돼가고 있다. 인수위도 ‘용산 내 위기관리센터 완비’를 집무실 이전 요건으로 내세우며 한발 물러선 모습이다. 하지만 ‘5월 10일 용산 집무 시작’이 야기할 불안과 우려에 대해 책임지고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용산 이전은 국정원 개혁과 다르다. 결단은 하되 이행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두어 달 용산 시대가 늦어진다고 역사가 후퇴하진 않는다. 그래서 묻고 싶다. 5월 10일에도 위기관리센터의 시계는 착오 없이 돌아갈 수 있는가. 국방부와 합참은 시간표 내에 질서 있는 이전이 가능한가.
이미 용산 이전 신경전으로 손해를 본 것은 당선인 측이다. 신구 대통령 회동이 독대 없이 끝나면서 글로는 남길 수 없는 국가 운영 노하우와 기밀을 전수받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구습의 폐해를 끊어내는 결단과, 명분이 그럴듯하다고 졸속으로 밀어붙이는 무모함과 오기는 구분돼야 한다. 집권 후에도 이런 식의 국가 의사결정이 계속되면 정말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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