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가 쓴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2017년 크리스마스 때 이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모든 사람을 도덕으로 평가하는 나라, 그곳은 한국’)를 썼다. 연말이라 별 기사거리가 없어 재미나 있으라고 썼더랬는데, 꽤 반응이 있었다. 하기야 일본인이 한국인의 MBTI를 봐 준 셈인데, 이런 주제는 꽤 대중적이지 않던가 말이다.
책의 요점은 ‘한국은 정의와 도덕주의 불나방들의 국가’라는 것이다. 실제론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철저하게 도덕과 정의를 지향하기에, 오늘 내가 목놓아 부른 도덕과 정의가 내일 나에게 부메랑 되어 돌아와 내 목을 친다 해도 모두가 도덕과 정의라는 불꽃을 향해 한사코 뛰어드는 불나방들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내로남불’은 특정 인물이나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내로남불 지적질’은 온 국민적 페스티벌이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얼굴에 있는 힘껏 똥칠을 해댄 뒤 “그래, 너 또한 더럽긴 매한가지구나”라며 손 마주잡고 씨익 웃어줘야 하는 게 이 게임의 룰이다.
그래서 이 게임의 최대 배신자는 공격받으면 적당히 엎드려 죽어줄 줄 모르고, 그거 우리 얼굴에 웬만큼 다 묻어 있는 똥이라는 진실을 ‘굳이’ 온 세상에 알리려는 이들이다. 너 하나 죽으면 끝날 일, 왜 이리 복잡하게 만드느냐는 괘씸죄와 잔혹한 응징이 뒤따른다.
책 뒷얘기를 좀 할 게 있다. 우리나라 번역본이야 2017년 겨울에 나왔지만, 원래 일본 출간 시점은 1998년이다. 무려 20년의 시차가 있다. 책을 직접 읽어본 사람은 조금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이 책 출간 계기는 2002 한일월드컵이다.
2002 한일월드컵,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가슴엔 벌써 ‘국뽕’이 가득 차 오르겠지만 거꾸로 일본에는 참 환장할 일이다. 월드컵을 아시아에서도 한 번 열어보자며 그렇게나 공을 들였는데, 뒤늦게 끼어든 한국이 세계평화가 어쩌고 ‘썰’을 풀어대더니 ‘한일 공동개최’라는 기이한(?) 형태로 결론지어졌다. 그게 1996년이었다.
오구라 교수가 1998년 이 책을 낸 건 이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2002월드컵이 한국에서 기어코 열려야만 할 이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 상황에서 한국은 대체 어떤 뻥을 쳐서 세계를 홀렸는가. 낯빛 하나 안 바뀌고 뻥을 쳐대는 엄청난 기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일본은 왜 한국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뻥을 쳐대지 못하는 소심한 나라가 되어버린 건가.
그 이전 수백 년 역사에서 단련된 주자학의 이(理)를 보라는 게 책의 뼈대다. 개인적으론 재미나게 읽을 만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참으로 일본스러운 비교문화론 정도면 된다고 본다. 일본더러 ‘축소지향’이라 했더니 그럼 한국 너네는 ‘뻥튀기’냐, 라니. 뭔가 쫄깃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번역에 20년이 걸린 건 ‘한국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할 것’이란 저자의 망설임 때문이었다 한다. 묘한 건, 마침내 저자 허락 아래 번역된 2017년은 하필 탄핵된 박근혜가 구속된 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당시 특검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은 2022년 ‘대통령 당선인’의 신분으로 박근혜를 찾아가 “면목 없다” “늘 죄송했다”고 말했다. 도덕과 정의가 흘러넘치는 한국의 속살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