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서구에서 근대적 보험이 태동한 건 15세기 대항해 시대다.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찾는 과정에서 배가 침몰하는 경우가 늘며 필요성이 대두됐다. 해적에게 피습당하거나 납치되는 일도 빈번했다. 이 경우 거액의 석방금을 내야 풀려났다. 1501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무역상이 해적에게 납치됐을 때를 대비해 300두카트(금화의 일종) 한도에서 석방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이 금액의 1.6%에 해당하는 보험료를 납입한 게 생명보험의 시초다. 목숨을 잃은 후가 아니라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안된 게 보험의 출발이었던 셈이다.
□ ‘계곡 살인 사건’은 이런 보험의 역사를 무색하게 한다. 피의자 이은해(31)는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걸 한사코 거부하는 남편을 “그럼 내가 뛴다”라는 엄포로 교묘히 자극하고 유도해 결국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숨지게 한 뒤 8억 원의 사망 보험금을 타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연일 드러나는 그의 엽기적 행각엔 소름이 돋는다. 사람을 살리는 게 목적이고 보험은 그 수단이어야 하는데, 그에겐 사망 보험금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인명은 한낱 돈벌이 사업의 수단에 불과했다.
□ 가장의 갑작스러운 부재 시 남은 가족들이 경제적 일상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망 보험의 순기능은 적잖다. 그러나 보험금을 노린 중대 범죄와 보험 사기란 부작용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17년에도 아내 앞으로 9개 보험을 든 뒤 유기 치사한 남편이 3억 원의 보험금을 챙긴 일이 있었다. 연쇄 살인범 강호순도 보험금을 타기 위해 집에 불을 질러 장모와 아내를 숨지게 한 범행으로 시작해 희대의 괴물이 됐다.
□ 보험사가 이은해의 사망 보험금 청구를 거절하며 묻힐 뻔한 진실이 드러난 건 다행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입을 거부했더라면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도 남는다. 소득 수준에 비해 과도한 보험료를 내거나 중복 가입하는 경우 사전 심사를 철저히 해 범행 시도 자체를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다. 제2의 이은해를 막으려면 사망 보험금 중대 범죄 처벌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보험사기방지특별법도 보완해야 한다. 지난해 전체 보험사기 적발 금액은 9,434억 원, 보험금 때문에 고의로 살인이나 상해를 저지른 이는 98명에 달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