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정치인들로부터 ‘부르네 마네, 가사를 외웠네 못 외웠네’의 대상이 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첫 소절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이다.
가사대로 일까.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 하루의 빛처럼 사라지고 나면, 만인의 가슴에 공동으로 새긴 한줌의 이름이 없는 게 의아하다. 윤상원, 박관현, 위르겐 힌츠페터 등, 알려진 이름들이야 있지만 빈약한 조명만 받으며 떠돈다.
사무쳐야 할 이름은 많다. 열흘 항쟁의 마지막,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사살된 ‘이름’만도, 확인된 이 16명이다. 문재학·안종필(16·광주상고1년), 염행렬(16·금오공고 2년), 박성용(17·조대부고 3년), 김종연(19·재수생), 서호빈(19·전남대 2년), 유동운(19·한신대 2년), 이강수(19·재수생), 홍순권(19·페인트공), 민병대(20·양계장 종업원), 박병규(20·동국대 1년), 이정연(20·전남대 2년), 김동수(22·조선대 3년), 박진홍(21·표구사 점원), 문용동(26·호남신학대 4년), 윤상원(29·들불야학 교사)이었다. 계엄사는 이날 17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60~70명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고교생, 노동자, 대학생, 재수생. 이 젊음들이 ‘죽기로 하고’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키며 나눴던 대화는 무엇일까.
이정연 열사의 어머니 구선악씨가 전한 아들의 이야기(2018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잔혹한 충성’). “아들이 ‘엄마, 아버지. 한 번 방에 앉아보세요’ 그러더라고. 할 얘기가 있대요. ‘엄마, 아버지. 우리는요. 선조 때부터 무서워서 방치해 온 잡초를 못 뽑았잖아요. 우리는 하나라도 죽음으로써 그 잡초를 뽑을 거’라고. 그 말 하고 나가서 못 들어왔어요. 저는, 대학교 다니니까 많이 배워놓으니까 저런 소리도 할 줄 아는가 보다, 뭔 소린지를 몰랐지요.” 상업교육과 학생이었으니 아마 선생님을 꿈꿨을 청춘이었을 테다.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씨가 전한 아들의 말. “‘창근이는 죽었는데 나만 살겠다고 가면은 쓰겠냐’고 ‘나만 들어가면 쓰겠냐’고, 지금도 그 말이 생생해요.” 친구의 죽음 앞에 부끄럽고 싶지 않은 고교 1학년이었다.
누구의 ‘이름’을 전하느냐, 누구의 ‘이름’과 이야기에 주목하느냐는 언론 및 그 사회의 수준과도 연관이 깊다. 12·12쿠데타 및 5·18학살을 자행했던 군사 독재자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일생을 조명하는 기사와 사진들이 뉴스를 압도했었다. 비판 보도라 해도, 학살자의 일생은 ‘화보집’처럼 펼쳐져 강조되는 동안, 마지막 도청을 지켰던 젊은이들의 사연조차 잘 알지 못하고, 또 알리지 못했다는 게 기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5·18은 극우세력들의 오랜 먹잇감이며, 여전히 인터넷 세상에서 조롱의 대상이다. 범람하는 악플을 보고 있자면 ‘군사 쿠데타와 독재, 학살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나’ 싶다. 구선악씨의 말대로다. “그놈의 잡초가 얼마나 뻣센데(질긴데).”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에는 5·18 왜곡에 대한 팩트체크와, 왜곡 제보를 받는 코너도 있다.
그래서 더욱, 5·18은 알아가야 할 대상이다. 민주화의 혜택을 받은 국민이라면 5월이 가기 전에 공부하고 ‘이름’ 하나쯤 가슴에 새겨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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