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운영 기본방침, 아베 입김에 여러 곳 수정
기시다 "아베파 말 너무 듣는다"... 리더십 상처
일본 정부의 올해 경제·재정 정책 청사진인 ‘경제재정 운영과 개혁 기본방침’에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원안의 상당 부분이 '아베 스타일'로 수정된 것이다. 내각이 아베 전 총리 세력에 휘둘리는 모습이 공공연히 노출됨에 따라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표방하는 정책의 큰 그림은 옅어지고 기시다 총리의 리더십이 상처를 입었다.
아베, "아베노믹스 폄하하나" 격분
8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전날 각의에서 의결된 '기본방침' 발표를 앞두고 자민당에선 두 가지 제언안이 나왔다.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재정건전화 추진본부’와 재정 적자가 더 늘어도 돈을 풀어야 한다는 ‘재정정책 검토본부’가 각각 낸 안이었다. ‘추진본부’는 자민당 총재인 기시다 총리와 아소 다로 당 부총재가 이끌고 있고 ‘검토본부’는 아베 전 총리가 최고 고문이다.
추진본부의 제언안을 미리 본 아베 전 총리는 현 내각이 ‘아베노믹스’를 폄하한다며 격분했다. 그는 아베파 의원에게 전화해 “너는 아베노믹스에 부정적이냐. 이제 같이 일할 수 없겠다”라며 격하게 질책했다. 이에 아소 부총재가 아베 전 총리를 달래기 위해 제언안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물가 싼 일본’ 등 아베노믹스의 부정적 영향을 드러내는 표현은 삭제되고 아베노믹스의 효능을 설명한 분량이 추가됐다. 아베 전 총리의 영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본방침' 정부 원안엔 "2025년 정부 재정 지출과 세수 균형을 맞춘다"는 목표가 적시돼 있었으나 최종안에선 빠졌다.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이지만, 아베파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검토본부' 간부는 “재정건전화 명분으로 방위비 증액에 상한이 걸리면 곤란하다”고 말했다고 마이니치는 전했다.
"방위력 5년 이내 근본적 강화" 서술도 아베 입김
요미우리신문은 '기본방침'에 “방위력(국방력)을 5년 안에 근본적으로 강화한다”는 표현이 들어간 것도 아베 전 총리의 입김에 의한 것이라고 전했다. 애초 기시다 정부가 마련한 원안에는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들어간 대로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한다”는 표현만 있었고 목표 기간은 설정하지 않았다. 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방위비를 GDP의 2% 이상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내용은 각주로만 소개했다. 그러나 아베 전 총리는 "'방위비는 GDP 2%를 목표로 5년 안에 근본적으로 올려야 한다'는 자민당 제언안을 '기본방침' 본문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최종안엔 ‘5년 이내’라는 기간이 명시되고 나토의 방위비 목표 기술이 본문으로 옮겨갔다.
"'듣는 힘'도 좋지만 너무 들어"... 기시다 리더십 상처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10월 내각 출범 이후 자신의 뜻과 달라도 아베 전 총리의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 올해 초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도 아베파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아직은 기시다파의 의원 수(45명)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94명)의 절반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다.
기시다 총리가 계속 아베 전 총리에게 끌려 다닌다면, 기시다 내각의 정체성이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기시다 정부의 간판 정책인 ‘새로운 자본주의’와 아베파가 중시하는 방위비 증액 중 어디에 정부 예산을 더 투입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경제 관료는 “기시다 총리가 ‘듣는 힘’을 호소하고 있지만, 너무 많이 듣는 게 아닌가 한다. 좀 더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중요한 과제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마이니치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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