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성소수자들의 사랑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 세상

입력
2022.06.11 04:30
수정
2022.06.11 09:03
12면
0 0

<74> 퀴어커플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드는 법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2년 전 한 남자애와 사랑에 빠졌다. 그건 내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여자애를 사랑하듯 남자애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만났던 그 여자애들의 복잡함과 자기 모순을 사랑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여자됨'에 양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고, 남들 눈에는 대체로 여자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그들 중 몇몇을 여자애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모욕이 될 것이다.

실패란 공통점을 가진 퀴어 연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여자애로 부른다면 그것은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발견해낸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바로 실패다. 원하는 성별로 '오인'받는 것에 실패하고, 연인 사이로 보이는 것에 실패하고, 심지어 우리가 원해서 상대방을 선택했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에도 실패한다. 이성애자들을 위해 설계된 세상에 자리를 배당받는 것에 실패하고, 남들이 말하듯 평범하게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실패하고, 우리의 앞선 세대와 이후 세대를 유기적으로 연결짓는 데에도 실패한다. 바로 이런 쓰라린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는 한에서 나는 그들을 여자애라고 부른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연인으로서 우리가 겪는 실패는, 단지 식당에서 오붓한 두 자리를 배정받지 못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 '친구'처럼 보이는 너희가 다른 이성애자 '커플'들이 앉는 자리를 원하는지를 이해하거나 상상하지 못하는 식당 종업원에게 우리를 설득해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상황 속에서 온다. 어딜 가도 따라붙는 이 지긋지긋한 설득의 요구는 분노스럽다기보다는 좌절스러운 것이다. 어쩌다 기운이 있는 날이면 나는 그런 증명을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빠르게 포기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사람들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고 온 날이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울었다. 울면서 서로의 벌어진 상처를 기웠다.

세상이 주지 않는 '자리'를 스스로 만드는 퀴어들

내게 여자애들과의 사랑은 이런 눈물 속에서 서로의 세계를 완전히 다시 짓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의 자리가 세상에 마련돼 있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비참하고 부끄럽고 슬픈 감정들이 곧 우리가 영구히 거주할 집의 재료가 된다. 세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한 집을 짓는 것. 곧 사랑하는 것은 서로의 피난처를 마련하는 일이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자긍심으로 제련하는 무기고를 품는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자리 없음, 곧 실패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된다.

마이클 워너. 위키피디아 캡처

마이클 워너. 위키피디아 캡처

내가 묘사한 퀴어 사랑의 특징은 퀴어 이론가 로렌 벌렌트와 마이클 워너가 제안한 '세계 만들기(world-making)의 기획'에서도 발견된다. '세계 만들기'는 세간에서 말해지는 '떳떳한' 관계, 공간, 감정의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들은 1998년 "공적 섹스(Sex in Public)"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퀴어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은 '세계 만들기의 기획'을 뜻한다. 필연적으로 '세계'에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보다 많은 사람이, 몇 안 되는 참조점 통해 지도에 그려질 수 있는 공간보다 더 많은 공간이, 타고난 감정보다 배울 수 있는 감정들의 양태들이 더 많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퀴어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가정적 공간·친족·커플이라는 형태, 재산 또는 국가와 맺는 관계가 아닌 다른 친밀성의 종류를 발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친밀성은 퀴어 세계 만들기의 창조성과 퀴어 세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로렌 벌렌트. university of chicago news 캡처

로렌 벌렌트. university of chicago news 캡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만약 실패와 눈물로만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아픈' 관계로 이해된다. 또한 경제적·정서적으로 자립하는 것을 어른됨의 기준으로 삼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속한 집을 짓는' 사랑은 의존적이며 미성숙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 만들기의 창조성'이라는 관점에서, 퀴어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발견하고 연결짓는 유일무이한 관점을 발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퀴어 사랑은 언제나 이성애-재생산 중심주의의 제도적 매트릭스 속에서 일시적이고, 불안정하고, 취약하고, 심지어는 '나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퀴어 친밀성의 연약함'이란 바로 이러한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기반 없음, 즉 '자리 없음'의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자리 없음에 자긍심을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성애에겐 너무나도 쉽게 허락되는 '자리'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상하게도 나는 남자애와 사랑에 빠지면서 처음으로 이 자리 없음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애들과의 연애에서 공적이고 사적인 자리 없음이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세상의 조건이었고 동시에 가능하면 잊거나 봉합해야 하는 상처의 원인이었다. 어딜 가나 우리에게는 자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친구인지 연인인지 구분하지 못했고 설사 연인으로써 받아들여준다고 한들 '보통의' 연인들에게 하듯 우리를 대하지는 못했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성별 각본 내에서의 고정된 역할이라는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항상 우리의 관계 속 힘의 역학을 고민하게 만드는 필요 이상의 자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남자애와의 연애에서는, 적어도 전자의 경우에는 모든 자리가, 모든 의미가 거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말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왜 오붓한 두 자리가 필요한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 애는 병원에서 내 보호자가 되는데에 아무런 자격 증명을 요구받지 않는다. 의사들은 내가 아니라 그 애의 눈을 쳐다보면서 "여자친구 분"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에 연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의하듯 알릴 필요가 없다. 세상이 이미 우리를 위해 디자인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가 "남자친구"의 안부를 물으면 화들짝 놀라게 된다. 남자친구. 나는 그 애를 단 한 번도 남자친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내 여자친구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나보다 앞질러 내가 만나는 그 남자애를 "남자친구"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우리가 서로 연인 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서로의 남자친구이고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확신해 마지 않는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는 듯이. 내가 가진 관계들 중 이렇게나 빠르게 이름을 가진 관계가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리' 없는 퀴어를 잊지 않는 세상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농담처럼 이제 너는 레즈비언도 아니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을 때도 나는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펑펑 울었다. 나는 상처를 받았다. 내가 더 이상 남들 눈에 레즈비언이라고 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내 지난 관계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을 바로 그 이름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아름다운 것들을 송두리째 몰수당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친구라는 말 따위로는 차마 담아낼 수 없는 세상 전부가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자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사랑하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자리를 만들었다. 만약 더 이상 내가 레즈비언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그 자리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어딘가에 묻어 두면 되는 것일까? 그러다 어느 날 내가 기억하는 것을 멈추면 묻어 둔 내 세상 전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창조적인 만큼이나 연약한 퀴어 세계 만들기의 기획은 때로 나를, 우리를 상실의 감각 속에서 울게 만든다.

앞으로 가족이 돼 아이를 낳을 '이성애자 커플'이라는 단위가 아니라면, 세상은 그 외의 것들에게 어떤 권리나 의무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고립시킨다. 그래서 동성애 인권 운동의 주된 요구 중 하나가 바로 결혼할 권리인 것이다. 이러한 권리의 요구는 물론 '자리 없는' 동성애자들에게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겠지만, 동시에 이성애 규범성이 의존하는 '정상 가족'이라는 단위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제도적 승인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퀴어 친밀성의 관계들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이 마땅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던 내 관계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한다.

이연숙 작가

이연숙 작가


이연숙 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