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시장이 불황이래."
"출판시장은 단군 이래로, 아니 파피루스 발명 이래로 쭉 불황이었어."
출판계 사람들은 그런 농담을 한다. 출판은 언제나 사양산업이었노라고. 그러나 아주 먼 옛날에는 매력 있는 데이트 상대가 되려면 시 한 편 정도는 외울 줄 알아야 하는 때가 있었다는 말이 전래동화처럼 전해진다. 한때 우리나라의 시집 판매량은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영화가 아니라 책 판매량이 100만 부를 넘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공익 예능이 시청률 30%를 넘었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 꿈이었나 싶다. 요즘 유튜브 구독자는 10만 명이 넘어야 '실버 버튼'을 받지만, 책은 1만 부만 팔려도 분야별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책의 시대는 간 걸까?
반짝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지난 주말 열렸던 서울국제도서전에 닷새간 10만 명의 인파가 몰린 것이다. 나와 동료들도 책을 싸들고 다른 독립출판사들과 함께 손님을 맞았다.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의외로 판매가 쏠쏠하다는 이야기도 왕왕 들렸다. 방문한 사람들은 오래 머물다 갔다. 무엇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했다.
먼저 출판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한때 순수 문학에 비해 폄하되던 장르 문학이 본격적으로 양지로 나왔다. 장르 전문인 안전가옥 부스에서 책을 판매하던 직원들은, 부스를 방문하는 고객들을 일대일로 응대하며 적극적으로 상담에 응했다. 직원들은 서점의 사장님보다는 애플숍의 영업사원을 닮았다. 벽에는 게임 빙의물, 팬픽, 오메가버스, 무협 웹소설 등이 어떤 갈래로 뻗어나가는지 볼 수 있는 '장르지도'가 있었다. 책의 물성과 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기획 전시도 열렸다. 책의 표지만 보고 내용을 판단하지 말라는 속담은 옛말이다. 책도 만듦새가 좋아야 잘 팔린다. 이제는 책의 디자인과 제본, 종이까지 책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는다. 잘 팔리는 책은 스페셜 에디션이 따로 나오는 게 기본이다. 오디오북을 체험할 수 있는 오디오 라운지에는 만화 코난의 성우들이 나와 책을 읽었다. 반면 한쪽에서는 타자기를 쳐서 종이를 인쇄해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도서전 내내 가장 사람이 몰렸던 독립 출판 코너에는 페미니즘, 퀴어, 비건 등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거나, 좁고 날카로운 주제를 깊게 판 책들이 팔렸다. 출판계가 불황이라는 말이 사실일지는 모르겠으나, 어려움 속에서 출판사들은 각자의 도끼를 더 날카롭게 벼르고 있었던 것 같다.
손가락으로 몇 번만 두드리면 세상 모든 정보를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 종이책은 사라질까? 도서전에 참여하며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반짝 보았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한 장씩 넘겨야만 얻는 것들이, 시간을 들이고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건 정보를 얻는다는 것, 그 이상을 담는다.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이 텍스트를 읽는 방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생각하는 훈련을, 사유하는 괴로움을, 그리하여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겪는다. 그래서인지 도서전에 몰려든 사람들 간에는 어떤 연대감이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서점에 가보면 어떨까? 당신과 닮은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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