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고물가로 세계 경제가 홍역을 앓으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이런저런 ‘스텝’이 유행어가 됐다. 베이비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 또는 인하), 빅스텝(0.50%포인트),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의 뜻을 요즘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더 세분화해 마이크로스텝(0.10%포인트), 울트라스텝(1.0%포인트), 점보스텝(2차례 이상 0.50%포인트 연속 인상)까지 회자될 정도다.
□ 지금은 마치 금리조정 공식처럼 여겨지는 베이비스텝을 정착시킨 건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1987~2006년 재임)이다. 취임 후 연준의 물가관리 수단을 통화량에서 기준금리로 바꾼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목표금리를 공표하면서 0.25%포인트씩 소폭으로 조정하는 걸 즐겼다. 파급효과를 봐 가며 불확실성을 줄이자는 취지였는데 덕분에 시장의 신뢰가 높아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 대다수 중앙은행이 베이비스텝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린스펀 이래로 연준이 자이언트스텝을 밟은 건 1994년 11월, 빅스텝은 2000년 5월이 마지막이었다.
□ 역대로 금리조정 폭이 늘 1%포인트 밑에서만 움직인 건 아니다. 1979년 취임한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은 당시 13%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을 잡기 위해 취임 두 달 만인 그해 10월 6일 토요일 임시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4.0%포인트나 올렸다. 갑자기 뛴 금리로 주식과 집값이 폭락했는데 지금도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부른다. 결과적으로 볼커의 초강수는 이후 미국 경제 장기호황의 초석이 됐다.
□ 한국에서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향후 빅스텝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밝혀 시장을 놀라게 했다. 발언 직후 한은이 “원론적 입장”이라고 서둘러 진화했지만 요즘 시장 상황은 또 달라졌다. 만약 연준이 연말까지 계속 점보스텝을 밟으면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 3.0%를 훌쩍 넘어선다. 한미 간 금리 역전은 늘 외화유출 위험을 부르는데, 지금 1.75% 기준금리를 쥔 한은이라고 계속 베이비스텝을 고집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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