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국가정보원이 6번째 원훈(모토)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를 최근 공개했다. 1961년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설립되며 만든 첫 모토와 같다. 직원 설문조사에서 절대다수가 첫 원훈의 재사용에 찬성했다고 한다. 당시 원훈석을 찾아내 본관 앞에 재설치한 국정원은 ‘복원’이란 표현을 썼다. 작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바꾼 문재인 정부와는 절연 선언이다.
□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는 원훈은 국정원 상흔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정치개입 단절을 내세워 모토를 바꾸었다. 문 정부는 원훈을 ‘신영복체’로 새긴 것이 교체 이유로 작용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한 고(故) 신영복 교수 글씨체가 조직 목적에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제 국정원에는 모두 5개의 원훈석이 서 있다. 본관 앞 현 정권이 세운 것과 과거 정권에서 사용되다 청사 숲 한 켠으로 밀려난 4개다. 원훈 교체가 개혁, 단절, 환골탈태의 왕도가 아님을 시위하듯 보여주는 장면이다.
□ 바뀐 원훈이 더는 바뀔 일 없는 마지막 원훈이 되기 바라는 간절함은 국정원이 더할 것 같다. 국정원은 늘 권력에서 멀어지겠다고 했으나 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사드처럼 실력으로 거듭나는 것도 급하지만 정치의 덫에서 벗어나는 데는 권력의 단절 의지가 우선이다. 이번에도 군불이 지펴지는 걸 보면 한바탕 태풍이 몰려오는 것 같다. 1급 부서장 27명 전원이 대기발령 조치로 직무에서 배제됐고, 내부 인사명령의 번복 잡음도 들린다. 대대적인 내부감찰은 이전 정부 활동의 위법성, 특수활동비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 첫 모토를 만든 JP는 회고록에서 그 뜻을 “숨은 일꾼으로 익명의 열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다짐”이라고 했다. 누가 몰라줘도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게 정보기관 본연의 일이다. 일각에선 ‘양지를 지향한다’는 문구가 목에 걸린다고 한다. 음습한 방식으로 정권 호위에 가담했던 과거를 연상시킨다는 얘기다. 상용자해(常用字解)는 지향(指向)의 ‘향’을 갑골문에 근거해 창문과 신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보관하는 그릇을 본뜬 글자라고 해석했다. 이번엔 정말 우려를 씻고 신을 맞이하듯 국가를 위해 조용히 헌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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