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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드러내는 혐오가 더 무섭다

입력
2022.07.08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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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7일 밤, 한 유튜버가 박지현 민주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집 앞으로 찾아가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박지현 전 위원장은 "디지털 시대에 누군가의 집 주소를 터는 일이 이렇게 쉽다는 것을, 디지털성범죄를 파헤치면서 수백 번 목격"했었다며, 그날 집에 바로 가지 못하고 서울의 밤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고 밝혔다. 유튜버는 얼굴을 밝힌 채였다.

십 년 전만 해도 인터넷에 약자·유명인에 대한 비난이나 혐오 발언을 내뱉는 이들은 악플러라는 별명을 달고, 스스로의 존재를 익명 속에 감추어 왔다. 하여,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터넷 공간에 대한 우려와 댓글 창에도 실명 인증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혐오자들은 당당하다. 이슈 선점을 위해 사회적 약자나 유명인에 대한 자극적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이버 렉카 유튜버들은 자신의 얼굴을 간판 삼는다. 정의구현을 하는 사도처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소녀상 철거 촉구 시위를 벌인 이들도 마스크를 벗고 언론 취재에 기꺼이 응했다. 왜일까? 무엇이 혐오하는 이들의 어깨를 펴게 해 준 걸까?

하나는 관심 자체가 긍정성과 부정성을 떠나 자원이 되었다는 데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좀 더 사이트에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추천한다. 현상에 대한 복잡하고 긴 설명보다, 단순하고 자극적인 부추김이 더 재미있다. 어그로(관심을 끌기 위해 인터넷에 자극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는 일)는 돈이 된다. 돈이 된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쉬운 정당성 확보의 근거다.

또 다른 하나는 '팩트 체크'가 힘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하는 점은 이슈의 속도에 덮여 버린다. 이제는 사실 근거를 차근히 모아 부당한 비난의 말을 내뱉은 이에게 들이밀어도,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때때로 우리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면', '진실을 저 사람이 알게 된다면' 마음을 돌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에 사실이 무엇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혐오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기 때문이다. 사이버 렉카 유튜버들이 실제로 자신들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정의구현', '참교육', '사이다'와 같은 표현을 쓰는 이유다. 그러나 정의실현으로 얻는 것이 통쾌함뿐이라면, 그 정의실현에는 문제가 있다.

마지막 이유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한 공감 능력의 부재다. 상상력이 부족하면 소설 '안나카레니나'는 '불륜하던 상류층 여자가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함'으로 요약되고, 드라마 '안나'는 '거짓말을 일삼던 여자의 이야기'로 끝날 것이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우리는 상대의 입장에 서 보려 할 의지도 상상력도 잃었다. 상대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면, 우리는 사회가 가장 비난하는 사람의 입장마저도 옹호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상대의 처지를 이해할 만한 여유나 상상력이 부족하다.

나는 얼굴을 드러낸 혐오가 더 무섭다. 그 얼굴에서는 신념이, 가끔은 긍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믿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믿음의 근거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은 곧 부정이니까. 그러나 그 신념은 누구를 위한 신념일까? 무엇을 위한 신념일까?


박초롱 딴짓 출판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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