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마치고 들어갈 때마다 아빠가 묻는 말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밥은 먹었냐? 모처럼 동료들과 고기 구워가며 든든하게 회식한 날에도, 자꾸 느는 체중 걱정에 탄수화물 피해가며 샐러드만 챙겨먹은 날에도, 아빠는 '밥은 먹었냐?' 물었다. 세상에서 백 걸음 정도는 멀찍이 비켜난 퇴직자의 삶에서, 아빠의 제일 중한 관심사는 자식이 집 떠날 때 모습 그대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에 맞춰진 듯 했다.
월급 주는 이의 끝없는 질문과 요구에 답을 찾다가 퇴근하는 게 월급쟁이 일상인지라, 이게 뭐 그리 중한 질문일까 싶은 뚱한 마음부터 울컥. "알아서 해요" 냉랭한 대답이나 내뱉고 나면, 방으로 들어가는 문턱에서 후회다. 세상 어느 이가 내가 든든히 잘 먹었나, 행여 주린 상태는 아닌가 걱정해 줄까? "밥 한번 먹자"가 아무 영혼 없는 인사말인 이 세상에서 말이다. 늘 알면서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고운 대답 한번 선선히 내놓지 못하고 거실에 멀뚱히 아빠를 남겨놓을 때면 수니온 곶에 덩그러니 남은 신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스의 남쪽 땅끝마을, 바다로 툭 튀어나온 수니온 곶의 언덕에 자리잡은 포세이돈 신전은 옛 시절 배를 타고 아테네로 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얼굴이었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대리석 기둥들이 서 있는 모습은 아테네 최고라 해도 손색없을 풍경. 특히 온갖 포도주 색으로 신전을 물들이는 석양의 시간은 애잔하면서도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그 벼랑 끝에서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는 멀리 떠난 아들 테세우스를 기다렸다. 크레타의 미궁에 사는 황소머리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아테네 인들을 바치던 시절, 테세우스는 자진해서 인신공물이 되겠노라 나선다.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죽이고 살아서 나오면 더 이상 인신공물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조도 받아냈기에, 실타래를 풀며 미궁으로 들어가 괴물을 맨주먹으로 때려죽인 다음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을 벗어나는 기지도 발휘한다.
헤라클레스와도 견줄 만큼 당대 최고의 영웅인 아들도 늙은 아버지에게는 그저 매 순간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테네 젊은이들을 구해냈다는 승리의 기쁨에 취한 탓이었을까? 테세우스는 무사 귀환할 때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꿔 달라는 아버지와의 약속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검은 돛을 단 채로 등장. 오매불망 흰 돛을 단 배만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는 절망에 내내 기다리고 섰던 절벽 아래 바다로 몸을 던지고 만다.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 보낸 불효자 테세우스도 훗날 자식 일로 잔뜩 골머리를 앓았으니, "너도 네 자식 생겨봐야 안다"는 어르신들 한숨도 이해가 된다. 일년 내내 뒷모습만 보여주며 살다가도 모처럼 얼굴을 보여 주겠다며 부러 자식들이 찾아오는 계절, 5월이다.
하지만 10년 전부터는 4월을 지나 5월로 가는 이 시간이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얼마 전 한국일보 세월호 10주기 기획기사에서 유족들이 가장 바라는 게 뭘까 하는 질문에 "다시 살아 돌아오는 거요"라는 대답이 가슴에 턱 내려 앉았다. 하루의 몇 시간 떨어져 있다 돌아오는 자식의 안위도 이리 걱정인데, 영영 돌아오지 않는 그 기다림은 얼마나 암흑 같을까? 벼랑 끝에 선 신전의 모습이 내 부모의 기다림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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