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은 안 그래도 베일에 싸인 조직이지만 요새는 특히나 의문덩어리다. 1급 보직국장 27명 대기발령에 이어 초유의 전직 국정원장 고발, 그리고 국정원-통일전선부 핫라인 감찰 등 놀라운 소식의 연속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국책 과제를 추진하기 위해 전 정부와 코드가 맞은 1급 정도는 자연스럽게 물갈이할 수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 때도 적폐청산 때문이긴 하나 1급 전원 물갈이 인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곧바로 후속 인사를 낸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 국정원은 50일 가까이 1급 부서장 아래 직급인 단장의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명예퇴직 절차가 남아 불안한 대행 체제는 9월까지 이어질 수 있다. 국익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이 장기간 반쪽짜리 리더십으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내부는 정권 교체의 여파로 뒤숭숭하다. 전 정부 때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감찰로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국정원 안팎에서 물갈이를 주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전직의 입을 빌려 전 정부 시절 인사 전횡, 대북정보력 약화 비판이 여과없이 밖으로 나오는 건 내부 숙청의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전 정부에서 두 번 승진한 사람들은 무조건 솎아낸다는 흉흉한 소문도 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남북 대화가 무르익었던 2018년 국정원과 통전부 사이에 오간 수십 건의 핫라인 메시지도 들여다보고 있다. 부적절한 대화나 대가가 오갔는지 들여다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불법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북한과의 대화라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냉전시대 대결적 인식이 의심된다.
핫라인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한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The sum of all fears)는 일촉즉발의 핵전쟁 위기에서 정보기관이 열어놓은 백도어 채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특히 사고나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으려면 서로 간 신뢰의 구축이 필수다. 아무나 열어본다면 이미 핫라인이 아닌 셈이다. 국정원-통전부 라인은 남북 간 대화의 명맥을 이어온 핵심 채널이다. 대북 업무 인계 차원도 아니고 단지 꼬투리를 잡기 위해 핫라인을 파헤친다면 제 살을 베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국정원이 과거로 뒷걸음질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의 공론화가 전 정부가 놓친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게 직권남용이라며 국정원 차원에서 검찰에 전직 상관들을 고발한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복잡하게 얽힌 정책적 판단마저 형사사건화하는 건 이미 적지 않은 반론을 불러왔다. 지금도 법 테두리를 넘나드는 해외·대북 공작 업무가 앞으로도 면책특권을 누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취임 초기 53%까지 올랐던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24%로 떨어졌다. 여러 원인이 꼽히지만, 1급 부서장이 실종된 지금 국정원 상황처럼 과도한 '전 정권 지우기'에 나선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제는 되돌아봐야 할 때다. 검찰총장 시절 친문으로부터 거친 공격을 받아 전 정권 때 고생한 사람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예회복과 합당한 보상, 한풀이와 인사 보복은 구분해야 한다. 공정과 상식의 국정 가치마저 권력을 향한 탐욕과 갈등으로 오염되면 지지율 추락 속도는 더 빨라질지 모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