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볼 땐 얼떨떨했다. 액션 장면이 강렬했고, 대범한 접근이 눈길을 끌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심야에 잠을 이겨내며 본 영화라 쉽게 판단할 순 없었다. 좀 길다 싶긴 했으나 예사롭지 않은 영화라 직감했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헌트’를 첫 대면했을 때 인상이다.
지난달 27일 ‘헌트’를 언론시사회에서 다시 만났다. 처음 봤을 때보다 민첩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진감과 긴박감이 맞물리며 재미를 빚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칸영화제 상영 버전보다 10분가량을 줄였다고 한다. 세계 최고 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점에 자만하지 않고, 관객 마음에 들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 한 의지가 엿보였다. 배우 이정재가 감독 이정재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다. ‘헌트’는 올해 여름 한국 영화계 최고 수확이다.
극장가 최고 대목으로 꼽히는 여름 시장이 저물어 간다. 한국 대작 4편이 참전한 흥행 대전의 승자는 확정적이고, 패자는 굳어졌다. 김한민 감독의 ‘한산: 용의 출현’이 18일까지 636만 명을 모아 여름 흥행 왕좌에 오를 기세다. ‘헌트’가 232만 명으로 ‘한산’을 쫓고 있으나 2위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197만 명),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 1부(152만 명)는 흥행세가 꺾인 지 오래다. 승패가 갈렸다고 하지만 승자라고 크게 웃을 처지는 아니다. ‘한산’은 극장 관객 기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긴 정도다. ‘헌트’는 더 분발해야 하고, ‘비상선언’과 ‘외계+인’은 곡소리가 날 지경이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은 다시 활짝 열렸으나 관객은 기대만큼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 시장을 들여다보며 코로나19 이후 급변을 감지했다. 관객은 이제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제아무리 유명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덩치 큰 영화라고 해도 꼼꼼히 따진 후 지갑을 연다.
여름 대작들은 대체로 시장 변화를 읽지 못했다. 코로나19 이전 기획된 영화들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나 관객의 관람 행태를 따라잡지 못했다. 특히 ‘비상선언’과 ‘외계+인’은 상업영화의 미덕에 충실했나 의문이 든다. ‘비상선언’은 후반부 메시지 과잉이 흥행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고 해도 과유불급이었다. ‘외계+인’은 이야기 하나를 둘로 쪼개 각기 다른 시기에 선보이려 한 시도가 패착이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몰아보기가 익숙해진 시대, 관객의 편의를 무시한 개봉 전략이었다.
‘비상선언’은 260억 원, ‘외계+인’은 330억 원(2부 제작비까지 포함하면 700억 원)이 각각 들었다. 마케팅비를 더하면 더 많은 돈이 투여됐다. 흥행 참패의 후유증이 클 듯하다. 상품성 높은 감독들의 실패라 상처는 더 깊다. 기성 감독들이 쓴잔을 마신 상황에서 주연까지 겸한 신인 감독 이정재의 성공이 도드라진다. 자본으로선 기성 감독의 독자적인 영역에 의구심이 들 만도 하다.
나쁜 일은 동시에 오는 걸까. OTT 쿠팡플레이가 이주영 감독의 편집권을 무시하고 드라마 ‘안나’를 8부에서 6부로 줄여 영화계의 분노를 사고 있다. 영상산업이 빠르게 재편되는 시기, 새롭게 시장에 들어온 근육질 자본의 맨얼굴에 영화인들은 씁쓸해한다. 이래저래 감독들에게 올여름은 잔인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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