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여린 얼굴, 그 여린 얼굴만큼이나 예민하고 섬세한 표정, 특정한 이미지로 쉽사리 고정되지 않는 유동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포착되는 섬세한 십 대 소녀들의 존재. 소녀들의 눈빛과 표정은 십 대 소녀들을 향한 익숙한 시선들에서 미묘하게 어긋난다. 최근 하이브 레이블 소속 어도어(Ador)에서 나온 신인 걸그룹 뉴진스(NewJeans)에 대한 느낌이다. 심플하고 감각적인 영상들에서 이 다섯 명의 소녀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걸그룹들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사회가 '소녀'에게 부과하는 한정적이고 전형적인 시선들에 부합할 듯 부합하지 않는, 청순, 섹시, 아니면 걸크러시라는 분류 안에 쉽사리 포섭되지 않는 이미지.
뉴진스를 보며 문득 나의 '소녀' 시절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팝가수 마돈나가 등장했고, 당시에 나는 스스로도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마돈나가 전해주는 어떤 감각들에 매료되었다. 찢어진 스타킹, 뒤집어진 속옷, 웨딩드레스, 십자가 목걸이들과 묵주들을 한 번에 조합하는 마돈나의 도발적인 이미지 자체가 어린 나에게 주었던 해방감. 1980년대에 십 대였던, 게다가 집안 대대로 가톨릭이고 지극히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어린 내가 나 자신의 욕망을, 심지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모님과 사회가 정해놓은 소녀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나는 내가 놓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돈나의 도발적 이미지들은 무언가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자유에 대한 모호하지만 강렬한 감각들을 어린 나에게 불어넣었다. 상당히 외설적인 마돈나의 화보집을 사들고 등교했던 날, 선생님에게 걸려서 출석부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화보집을 압수당한 적이 있었다. 졸업식 날 찾으러 오라고 윽박지르며 화보집을 뺏어간 담임선생님에게 복수하듯, 나는 잊지 않고 졸업식 날 교무실로 찾아가 당당하게 내 물건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그 순간 선생님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며 느낀 통쾌함과 짜릿함을 기억한다. 한 마디의 가사로도, 강렬한 비트 하나로도, 그리고 몇 개의 이미지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에 자유와 해방에 대한 욕망이 나도 모르게 자라날 때가 있다. 마돈나가 나에겐 그랬다.
그때는 지금과 참 다른 시절이었고, 마돈나와 뉴진스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도 왜 나는 뉴진스를 보며 마돈나가 떠오른 것일까. 아니, 왜 나에게는 마돈나를 좋아하며 자유를 꿈꾸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 것일까. 뉴진스에게서 나는 1980년대와 또 다른 방식으로 현재의 소녀들에게 요구되는 어떤 관념들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소녀들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발랄하고, 어리고, 예쁘지만, 도발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소녀들의 모호하고 양가적인 모습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의 감각을 느낀 것도 같다. 앞으로 뉴진스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도, 확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섹시하거나 청순하지 않으면 그저 센 언니의 모습으로만 재현되는 현재의 소녀들이 그 빈곤한 재현을 벗어나, 취향과 욕망과 불안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살아 숨 쉬는 인간 존재로서 더욱 긍정되는 시대를, 욕망의 대상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 되는 시대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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