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바라보지 않을 때
바다는 그 바다가 아니지.
아무도 우리를 지켜보지 않을 때
우리는 그런 바다가 되네.
그 바다는 다른 물고기들, 다른 파도들 또한 갖고 있지. (중략)
-쥘 쉬페르비엘 '비밀스러운 바다'
비극이 시를 깨운다. 일가족이 폭우로 반지하 집에 갇혀 숨졌다. 세 모녀가 병고와 생활고에 지쳐 떠났다. 바라보지 않은, 지켜보지 않은 바다는 바다가 아니었다. 참담한 죽음을 목도한 뒤에야 다른 물고기들과 다른 파도들을 우리는 본다. 분노와 동정, 관심과 공감은 항상 늦다. 멈추지 않는 평범한 삶은 기약 없는 요란한 대책을 노상 앞서간다.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긴 기억, 반지하의 추억을 나누려다 접었다. 답을 주지 못하는 개인의 경험이 부질없이 여겨졌다. 자책이 밀려왔다. 기자로 밥벌이하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고백하건대 '약자 편에 서겠다'는 다짐을 '나는 벗어났다'는 안도가 잠식하고 있다.
주말마다 살고 있는 동네를 거닌다. 반지하와 단독 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서울 강북의 주택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다. 집 앞에서 종이박스와 폐지를 싸매는 할머니, 자전거를 손보는 할아버지, 골목에 앉아 담소하는 노인들, 마을 어귀 놀이터를 채운 젊은 부모와 아이들, 무더위 때문에 열어놓은 문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의 윤곽. 이웃의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 최근 마음을 당겼다. '우리 동네는 아직 안전하구나.'
초등학생 아들은 일요일이면 꼭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전세보증금 8,500만 원, 세 식구가 누우면 꽉 차는 공간에 아이 두세 명이 장난감을 늘어놓으면 내 노트북을 놓을 자리도 없다. 어른은 그 상황이 민망하고 불편한데 죽이 맞은 아이들은 재잘재잘 즐겁기만 했다. "집이 작아서 창피하지 않아?"(아빠), "그게 왜 창피해요?"(아들) 공간의 크기보다 공감의 깊이가 더 중요함을, 아이가 어른의 스승임을 새삼 깨달았다.
부동산 우상, 내 집값만 추앙하는 세상에서 주거 공간은 사람을 지워 버린다. 거기 사람이 산다는 사실은 뒤로 밀린다. 어른의 욕망만 들러붙는다. 빈부 격차, 박제가 된 불평등, 그로 인한 인식의 단절만 날것으로 대변한다.
예컨대 반지하를 아예 없애 버리면 재난도, 가난도, 소외도 사라지는 유토피아가 건설될 것처럼 '반지하 퇴출'을 선언한다. 불행이 뒤덮은 공간, 아직 많은 서민이 사는 비슷한 공간을 "누추한 곳"이라고 단언한다. 생전에 사생활이 노출될라 늘 신경 쓰였을 창, 그 너머로 구경하듯 쭈그려 앉아 비극의 껍데기만 들여다본다. 봉사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는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
비극은 자화자찬이나 홍보의 수단이 아니다. 가난은 구경거리가 아니다. 동정과 공감은 쇼가 아니다. 그래서 누추한 건 반지하가 아니라 위정자의 언행이다. 일만 터지면 뒤잇는 실언, 실수, 사과 운운이 지겹고 두렵다. 거기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자유'를 사랑하는 정부니 신(新)자유주의 신봉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 대사로 끝을 갈음한다.
"생각을 조심해, 말이 되니까. 말을 조심해, 행동이 되니까. 행동을 조심해, 습관이 되니까. 습관을 조심해, 인격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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