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일본의 온천, 휴식과 이완의 문화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 서로 다른 한국과 일본의 온천 문화
일본에서 살기 전에는 온천이 그리 좋은 줄을 몰랐다. 한국에도 유명한 온천지가 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때 대중목욕탕이 큰 인기를 끌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과 함께 목욕을 한다는 발상이 어색했다. 한국에서 온천에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욕조 속에서 편안하게 대화하는 목욕객들의 거침없는 태도와 왁자지껄한 탈의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썩 즐기지 못했다. 사실 일본에서 온천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도 “일본의 온천 문화가 유명하다니 한번은 경험해 보겠다”는 연구자로서의 호기심이 더 컸다. 그런데 웬걸 한번 일본의 온천을 경험한 뒤에 그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의 온천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한국의 온천은 활기가 넘친다. 대욕조에서 열띤 대화가 오가기도 하고, 탈의실에서 모르는 사람이 허심탄회하게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반면, 일본의 온천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지인과 함께 가도 욕탕에서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각각 휴식을 취한다. 한국에서는 목욕이 몸을 구석구석 씻어서 청결하게 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있다. 온천에서 때를 미는 것도 자연스럽고, 대중목욕탕에는 이를 돕는 세신사가 상주하기도 한다. 반면, 일본에서 목욕은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근다는 의미가 더 크다. 욕조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씻지만 그것이 온천에 가는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는 의미의 ‘목욕(沐浴)’이라는 단어보다 ‘온탕에 몸을 담그다, 온탕에 들어가다(お風呂に浸かる, お風呂に入る)’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온탕에 몸을 푹 담가 체온을 높이는 것은 추운 겨울을 건강하게 보내는 일본식 비결이기도 하다. 한국의 온천이 편안하고 친밀한 사교의 공간이라면, 일본의 온천은 나홀로 긴장을 풀고 휴식하는 회복의 공간이다.
한국 온천의 활기찬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과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일본의 온천만큼 심신의 피로를 달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일본에서 원없이 온천 탐방을 했다. 하룻밤 숙박에 수십만 원을 내는 고급 온천에 묵은 적도 있고, 한물간 테마파크 근처의 허름한 노천탕의 신세도 져 보았다. 일본 원숭이들도 몸을 덥히러 온다는 야외 온천탕에서 함박눈을 맞는 이색적인 경험도 해 보았고, 두세 명이면 꽉 차는 작은 욕조에 몸을 구겨 넣고 쓴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고급 온천이든 싸구려 노천탕이든,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행복은 동일하다. 건강에 좋다는 온천수의 효능도 있겠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벽한’ 휴식의 긍정적인 효과를 실감했다.
◇ 휴식과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일본 온천
일본에는 온천이 많다. 화산대에 자리한 덕분에 지진이나 화산 등 자연재해도 잦지만, 그 덕분에 온천이 풍부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지금도 전국에 2만7,000여 곳의 온천 시설이 건재한데, 경기도 면적의 절반을 좀 넘는 오이타현(大分県)에만 무려 5,000여 곳, 초대형 도시인 도쿄가 속한 도쿄도(東京都)에도 100여 곳이 넘는 온천 시설이 영업 중이다. 일본 열도에서 온천을 즐긴 역사도 오래되었다. 6,000여 년 전 조몬 시대의 유적에서도 온천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규슈의 벳부(別府), 시코쿠의 도고(道後) 등의 온천 휴양지는 무려 천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왔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에 자연 현상으로서 온천이 드물지는 않다. 화산대와 면한 세계 곳곳에 크고 작은 온천이 있고 관광지로도 인기를 누린다. 그런데,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온천은 수영복을 착용하고 휴양과 레저를 함께 즐기는 다목적 오락 시설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자연이 만들어 준 온수 풀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어울려 물놀이를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이런 온천을 즐기는 방법이다. 역사적으로는 튀르키예나 고대 로마 등에서 목욕탕이 정치 토론이나 사교의 장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세계적인 경향을 따지자면 온천은 사교나 오락의 공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한국이나 일본처럼 알몸으로 여럿이 온천탕을 공유하는 방식은 드문 축에 속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본처럼 너른 국토 어디에서나 뜨거운 물이 솟는 경우는 유일하다. 풍부한 온천 자원 덕분에 일본에서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온천을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가족, 연인과 함께하는 사적인 여행은 물론이요, 학교나 기업의 연수나 워크숍 등의 장소로도 온천은 늘 제 1순위다. 온천 시설을 이용하는 가격대나 서비스도 다양하다. 한국에서도 온천은 인기 여행지 중의 하나이지만, 2만여 곳의 온천 시설이 성업 중인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본 온천의 분위기를 제대로 맛보려면 역시 ‘료칸(旅館)’이라고 부르는 고급 숙박 시설에 하룻밤 묵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욕탕도 객실도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여서 사적인 향유 공간으로서 더할 나위가 없다. 다른 온천객과 욕조를 공유하지 않도록 분리된 욕탕을 시간제로 대실해 주는 경우도 많다. 료칸에서는 우리나라의 한정식과 비슷한 고급 코스 식사인 ‘가이세키(懐石)’를 숙박객에게 제공하는데, 간혹 적지 않은 양과 가짓수의 메뉴를 운반해서 객실 한가운데에 널찍한 한 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뿐 아니라, 식사와 담소까지도 철저하게 준비된 사적인 공간에서 즐길 수 있도록 서비스와 동선이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료칸에 숙박하면 직원 이외에는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이 없다. 그 정도로 철저하지는 않아도 일본의 온천 시설들은 온천객의 프라이버시와 사적 공간을 중시해 서비스를 설계한다.
◇한국 사회에는 어떤 휴식과 이완의 기제가 있을까?
일본은 한국에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 사회다. 지진, 태풍, 화산 폭발 등 자연재해도 잦아서 늘 노심초사하는 분위기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기 쉬운 사회인 만큼, 효과적으로 긴장을 풀고 회복을 돕는 온천의 역할이 꽤 크다는 생각도 든다. 나만 해도 일본에 살면서 심신이 지쳤을 때에 온천의 덕을 많이 보았다. 타지에서 몇 년 동안 몸 고생, 마음 고생이 만만치 않았던 박사 논문 심사가 끝났을 때에도 온천 여행에서 피로를 풀고 위로받았다. 예전에 핀란드를 여행했을 때에 가정집이나 비즈니스 호텔, 심지어는 공유 오피스에도 단출한 사우나 시설이 갖추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핀란드에서는 사우나가 모두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라고 인식한다는 친구의 설명에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다. 일본의 온천처럼 핀란드에서는 사우나가 일상에 뿌리내린 휴식과 회복의 기제로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떨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자마자, 거리의 카페나 식당, 술집 등이 손님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면, 역시 함께 먹고 마시며 실컷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야말로 한국인의 호쾌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노래방에서 가창력을 뽐내거나, 혹은 온라인 게임 삼매경에 빠져서 세상사를 잊는다는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온천이나 핀란드의 사우나만큼은 아니어도, 우리 사회도 긴장을 풀고 피로에서 회복하기 위한 사회적, 문화적 기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싶다. 노력과 성취도 중요하지만, 휴식과 이완 역시 이에 못지않은 삶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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