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몰렸을까. 참사 후 일부 매체에선 ‘상업주의와 일탈로 물든 외래 문화의 무분별한 모방’ 식으로 핼러윈 축제 열기를 비난하는 기사가 나오는가 하면, 소셜미디어에서도 한국 전통문화는 외면하면서 외국 귀신 축제에 빠진 젊은 세대를 개탄하는 소리도 없지 않다. 이런 기성 세대에게 이태원 참사는 ‘상술로 포장된 정체 불명의 외국 축제를 개념 없이 즐기던 젊은이들의 일탈 행위로 벌어진 우연한 사고’쯤으로 여겨질 터다. 정부 당국자들이 자신들이 관리할 축제가 아니었다는 식의 책임 회피성 태도를 보이는 데도 이 같은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K콘텐츠가 글로벌 인기를 누리는 데 대해선 누구보다 ‘국뽕’에 취해 있을 이런 기성 세대가 모르는 것은 그 K콘텐츠 자체가 온갖 외래 문화가 뒤섞인 잡종 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오징어 게임’만 해도 일본 만화와 미국 할리우드 영화 등의 영향 아래 한국적 정서와 상황이 가미돼 나온 결과물이다. 문화적 혼종성이 세계인으로부터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낸 토대였다.
핼러윈 축제가 바로 그런 문화적 혼종의 대표적 축제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전통과 켈트 이교 풍습이 뒤섞이고 각종 민담과 놀이 문화가 가미됐다. 핼러윈 축제가 미국에서 번성한 것도 미국이 이민자들의 문화적 융합로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들의 축제와 멕시코계 이민자들의 ‘죽은 자들의 날’ 등이 엉켜 밑바닥에서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됐다. 핼러윈 축제의 특징인 유령 문화나 가면 분장은 현대 대중문화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비주류의 자생적 문화에는 늘 에너지가 넘친다. 고단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밑바닥의 꿈과 욕망이 꿈틀대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창백한 신념이나 단일한 기획 대신 수천 개의 소리가 들리고 수천 개의 색채가 아롱거리고 수천 개의 파도가 넘실댄다.
이태원의 핼러윈은 애당초 잡탕의 축제에 한국 젊은이들의 억눌렸던 에너지까지 가미된 또 다른 버전의 자생적 축제였다. 주최자 없이 스스로 규모를 키웠던 이 축제는 이번 사고가 없었다면 또 하나의 세계적 K콘텐츠가 됐을지 모른다. 비루한 현실을 하루쯤 벗어나 가상의 캐릭터로 분장하고 맘껏 춤추며 뛰놀고 싶었던 젊음은 어이없이 꺾이고 말았다. 책임 있는 당국자 중 한 명이라도 이 놀라운 에너지와 놀이 마당을 그저 곁에서 지켜만 봤어도 이런 황당한 사고는 없었을 것이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은 여러 방황 뒤 마지막에 이런 대사를 남긴다.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젊은이들을 질식시킨 것은 비좁은 골목이 아니라 이들의 자생적 열기를 뒷받침할 터전 하나 마련하지 못한 우리 사회다. 우리에겐 호밀밭의 파수꾼이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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