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자문회의에 들어간 적이 있다. 재난을 탈출한 장애인이 재난 트라우마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회의 중 머릿속에 물음표가 내내 떠다녔다. 장애인이 위급한 상황을 모면한 후 트라우마가 생긴다면 아마도 '내가 장애인이라서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됐구나'라며 자신의 장애를 탓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장애인이 자기 장애를 탓하는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 건가?
10·29 참사를 본 다음 날 아침, 휠체어를 타는 아이에게 아이 아빠는 "이태원 가지 마라"라고 했다. 아이는 "어차피 좁고 위험하고 휠체어로 들어갈 데 없어서 거긴 안 가"라고 답했다.
생각해 보면 출퇴근 시간에 진짜 출퇴근하는 휠체어 이용자들을 본 적이 없다.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몸이 불편하면 아예 출퇴근 시간 동안 지하철 탈 엄두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출퇴근, 직장생활이 쉽지 않다. 이태원은 이번 참사로 골목 구조가 알려지면서 장애인들에겐 공포의 장소가 된 셈이다.
불신과 공포가 쌓이면 외출과 사회생활 자체가 어려워진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가 20㎝ 가까이 되는 성신여대역 지하철 때문에 성신여대는 진학할 꿈도 꾸지 못한다든지, '지옥철' 9호선 라인의 직장을 갖는 걸 고민하게 된다든지. 아예 재난을 염두에 두고 원천봉쇄부터 하는 방어적 논리는 또 어떤가. 장애학생은 위험하니 아예 수학여행 가지 말라는 식의 논리, 지하철이나 버스가 위험하니 정상 출퇴근하는 직업은 갖지 말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이동권과 접근권 보장은 '위험하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휠체어를 타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위험하니 오지 말라는 이야기?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 수영장, 공연장, 심지어 학교에서도 들었었다. 어떤 환경이든 위험할 수 있다. 물리적 위험을 최대로 제거하고, 물리적 환경으로 보장 안 되는 건 제도나 인력배치나 매뉴얼로 보완하고, 가장 중요한 건 긴급한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과 신뢰를 쌓는 거다.
10·29 참사는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놀고 싶어하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억세게 재수 없어서 일어난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서사를 만드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사람이 죽는데 옆에서 무슨 노래를 불렀네, 누가 옆에서 킬킬거렸네 하는 걸 널리 퍼뜨리는 것도 다 반대한다. 개인의 탓이나 운명으로 환원하는 행위다. 그런 사람들은 만약 장애인이 이번에 이태원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면 "장애가 있는데 왜 그런 데는 가서"라며 혀를 찰 사람들이다.
이번 참사로 전국민이 또 한번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됐다.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개인 행동 요령을 알리는 건 매우 중요하다.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아비규환 속 선량한 의인들의 행동을 부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회 신뢰를 회복하는 데 공동체의식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사회 집단적인 트라우마의 극복과 치유는, 참사의 근원적인 요인이 밝혀지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책임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는 예방체계를 만들어야만 가능하다. 책임지는 태도 대신 방어적인 태도, 피해자나 희생자를 갈라치기 하는 행태는 트라우마를 더 깊게 만든다. 실망을 넘어 절망을, 불신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우리 모두 세월호 때 그걸 너무 뼈저리게 겪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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