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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특허권자 A사와 그 특허권을 이용해 상품을 제조하려는 B사가 있다. A사와 B사 중에서 누가 협상력에서 우위일까. 당연히 A사라고 여길 것이다. '특허괴물'로도 불리는 국제 특허관리전문회사(NPE)들이 최근 3년간 한국 기업에 130여 건 이상의 특허권 침해 소송을 걸어온 것도 이를 방증한다.
특허권자가 '을'(乙)이 되는 이상한 계약
그런데 최근 특허권자가 '갑'의 지위를 내려놓고 비특허권자에게 역(逆)으로 대가를 지급한 사례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다. 공정위는 지난달 13일 한국아스트라제네카와 알보젠 등에 총 26억4,5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졸라덱스라는 항암제 특허권을 보유한 한국아스트라제네카가 알보젠에 졸라덱스 유사약(제네릭)의 개발·시판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졸라덱스 독점판매권을 보장한 사실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졸라덱스는 1개월마다 맞는 주사제일 경우 약 20만 원, 3개월 주사는 50만 원 중반에 달하기 때문에, 해당 환자로서는 부담이 큰 약제다. 공정위도 이들 회사의 담합이 값싼 복제약 출시를 지연시켜, 결과적으로 암 환자의 의료비 지출을 늘리고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높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역지불 합의가 없었다면 오리지널약과 경쟁하는 복제약이 출시되어 암 환자들이 부담했을 약품 가격은 훨씬 더 저렴해졌을 것이다. 보건복지부 고시인 '약제의 결정 및 조정기준'도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 기준에 따르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의약품의 경우 복제약이 최초 출시되면 오리지널 약가는 기존 약가의 70%로, 복제 약가는 오리지널 약가의 59.5%로 책정된다. 더 나아가 세 번째 복제약이 출시되면 오리지널과 복제약 가격은 기존 오리지널 약가의 53.55%로 책정된다.
미국에서만 연간 35억달러 소비자 간접피해
미국 경쟁 당국도 역지불 합의가 의료소비자들의 피해로 이어진다는 데 동의한다. 미국 공정거래위원회(FTC)는 이미 2010년 ‘역지불 합의의 소비자 피해 분석 보고서’를 내놓고 이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의회에 요구한 바 있다. 당시 보고서는 2004년부터 2009년 9월까지 오리지널사와 제네릭사 간 이뤄진 합의가 총 218건에 달했다고 밝혔다. 또 이 가운데 66건(30%)이 제네릭 진입 제한 및 이에 대한 보상(역지불 합의)을 내용으로 한다고 지적했다. 복제약 출시를 막은 덕분에 제약업체가 매년 32억 달러의 추가 매출을 챙겼고,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77%의 비용 절감효과를 상실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FTC는 그 이후 벌어진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 현재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역지불 합의로 매년 약 35억 달러에 달하는 소비자 피해가 미국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역지불 합의는 과거에는 생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 유럽은 물론 중국에서도 역지불 합의가 발생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역지불 합의를 방지하는 일정한 기준이 마련된 가운데, 중국도 최근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지난해 12월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DPP4 억제제인 당뇨병 치료제 삭사글립틴(saxagliptin) 특허권 침해 분쟁 2심 판결에서 ‘의약품 역지불 합의’가 반독점법에 위배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제2 유형' 역지불 합의에 집중해야
역지불 합의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우선 '제1 유형'은 특허권자의 의약품 특허가 무효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 특허는 신규성과 진보성이 있어야 인정된다. 그런데 뒤늦게 진보성 없는 게 확인되는 바람에, 특허가 무효가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이처럼 경쟁업체가 특허의 진보성을 다투어 무효임이 밝혀지면, 소비자에게는 그만큼 득이 된다. 의약품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경쟁업체의 특허권을 보유한 상대 기업에 대한 도전을 장려하는 법을 시행 중인데, ‘해치 왁스먼법’(Hatch-Waxman Act)이 그것이다.
이 법은 복제약 회사가 오리지널 브랜드 의약품을 생산하는 업체의 특허권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면 복제약 회사에 독점적 판매권을 부여한다. 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영향으로 한국 약사법에도 도입되어 있다. 약사법 제50조의 2부터 제50조의 12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다만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복제약 회사가 특허 제약회사의 특허에 도전하는 사례가 드물다.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는 제약업체의 담합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특허권자는 특허가 무효가 될 위험을 부담하는 것보다, 복제약 회사에 대가를 지급하고 특허분쟁을 피하려고 한다. 복제약 회사도 분쟁을 피할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특허에 대한 도전에 성공하면 혜택을 보지만, 실패하면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권자가 회유의 손을 내밀면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의약품 가격이 내려가서 환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특허권자와 복제약 회사가 나눠 갖는 사태가 벌어진다. 가격 담합으로 소비자에게 높은 가격을 부담시키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역지불 합의를 규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1년 우리 공정위가 글라소스미스클라인(GSK)과 동아제약을 제재한 사건이 이 유형에 해당한다.
물론 '제2 유형' 역지불 합의도 있다. 의약품 특허권은 영구적인 권리가 아니다. 존속기간이 정해져 있다. 의약품 특허권의 존속기간이 다가오면, 복제약 회사는 효과가 같은 복제약을 만들어 의약품 시장에 들어올 준비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리지널 제약회사는 약가 인하를 막기 위하여 복제약 회사를 회유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지난달 공정위에 적발된 아스트라제네카, 알보젠 사이의 역지불 합의가 그와 같은 경우다.
그동안 제약업계에 대한 공정위 실태조사가 여러 번 이뤄졌으나, 실제로 적발한 경우는 드물었다. 역지불 합의가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역지불 합의로 인한 소비자 피해와 건강보험 재정손실 등의 규모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상태이다.
역지불 합의를 방치하면 의약품 시장이 왜곡되고 소비자 피해가 커질 수 있다. 그 점에서 역지불 합의에 대한 통합적 감시·대응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역지불 합의를 방지하여 경쟁을 보호해야 하는 공정위는 물론, 의약품 정책을 수립·집행하는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관계 기관이 역지불 합의의 적발과 방지를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다만 한국 의약품 시장 특성에 맞는 대응은 필요하다. 특허 존속기간 중에 발생하는 역지불 합의(제1 유형)보다는 특허 존속기간 만료에 임박하여 발생하는 역지불 합의(제2 유형)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대 다국적 외국계 제업업체가 특허권자이고, 국내 회사는 복제약 회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이 문제는 의약품에 대한 가격 및 유통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역지불 합의의 적발도 중요하지만, 역지불 합의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게 더 시급할 수도 있다. 약가에 시장 경쟁 원리를 보다 도입하는 것, 국내 제약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 등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익, 정책 목표가 관련된 매우 복잡한 문제라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정재훈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법관 출신 경쟁법 전문가다. 서울 고법 판사 시절 공정거래전담부에서 주요 공정거래 사건을 맡았고, 공정거래위원회의 비상임위원을 지냈다.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후 서울대 보건학 석사, 미 컬럼비아대 법학 석사, 고려대 법학 박사(경제법) 학위를 받았고, 현재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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