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와 가난해진 경제
결실에 기뻐할 연말은 사라져
낙담 위로할 정치의 역할 필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뉴스룸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해가 넘어가는 연말이 다가오면 곳곳에선 그동안의 결실을 돌아보고 계획을 정비한다. 기업들은 한해 결산을 통해 성과를 낸 프로젝트를 칭찬하고, 올바른 투자엔 보상을 하고 내년도 사업 방향을 설정하곤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마무리되면서 입시 성과를 받아 드는 수험생들은 이때쯤이면 나름대로 학창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며 더 나은 청춘의 삶을 계획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대형서점 매대에는 새해 다이어리와 캘린더가 크리스마스캐럴보다 매번 먼저 당도했다. 연말은 매조지이면서 스타트라인이다. 한해의 풍성한 수확을 만끽하고 동시에 새해의 희망을 얘기하면서 여기저기가 부산하다. 생명이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이지만, 그 씨앗은 속으로부터 움트는 시간이다. 덕분에 춥지만 따뜻하고 활기찬 계절이 겨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연말은 스산하고 아프기만 하다. 열매에 만족하고 기쁘게 내일을 논하기가 어느 때보다 힘들다. 10월 이태원에서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은 부모의 애가 끊어져 누구 하나 슬프지 않은 이가 없다. 그들의 죽음이 이유 없고, 그 이유를 누구 하나 책임지거나 제대로 묻지 않았다. 참사의 현장에 있지 않아 죽지 않은 이들은 겨울이 따뜻하다고 말할 수 없고 더구나 희망을 품을 염치가 없다고 느낀다. 억울한 죽음뿐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근면했고, 기업가들은 묵묵히 부지런했지만 대체로 어제보다 가난해진 한 해를 겪었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에, 전 세계를 3년 동안 옥죈 팬데믹에, 천정부지로 치솟은 미국 소비자 물가에 우리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지만 금리와 물가 폭등의 철퇴를 피할 수 없었다. 연간 무역적자는 400억 달러에 달하고, 젊은이들은 더 많이 '조용한 사직'을 말하고, 젊은 부부들은 더 적게 아이를 낳는다. 결실은커녕 그럴듯한 꽃조차 피워내지 못한 비운의 한 해를 살아낸 것 같다.
그래서 희망을 얘기하기 힘들고 좌절하는 연말이라면, 혹은 체념한 채 새해가 오더라도 열매를 꿈꾸지 못할 것 같다면 우선 이 말을 곱씹어보자.
'싹은 틔웠으나 꽃을 피우지 못할 경우가 있고, 꽃은 피웠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수도 있다(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 논어 자한편에 실린 문장이다. 노력했으나 끝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안타깝게 꽃이 꺾이기도 한 한해였다. 다만 열매를 얻을 수 없었던 건 가지가 상했고 수분(受粉)의 타이밍이 빗나갔을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뿌리가 싱싱하다면 수목의 저 깊은 곳엔 씨앗이 있고 꽃이 있고, 그리고 열매가 있으리라. 3년째 애지중지 키워온 동백나무는 아직 꽃조차 피운 적이 없지만, 새봄엔 죽지 않은 그 뿌리를 한번 더 믿어보려 한다. 지난 주말 서산 개심사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었다. 낙엽마저 바스러져 깔려있는 길 끝엔 어느 가지 하나 손에 닿지 않는 모과나무가 홀로 우뚝 서있다. 그 가지에 계절을 잊은 듯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 모과들은 한파를 견디고 언젠가는 생명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단단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낙담하고 고생했던 한해를 꾹꾹 밟고 일어서려면, 그러나 개인의 마음가짐만으로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져야 할 건 정치의 존재감이고 위로이다. 토양에 부족한 양분을 공급하고, 썩은 가지를 잘라내 열매가 자랄 환경을 만들어주는 역할은 오롯이 공동체의 최상위 엘리트인 정치 영역에서 맡아야 한다. 국회 예산심사가 정쟁에 발목 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모습 앞에 국민은 내년엔 올해 이루지 못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까. 눈물을 쏟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 옆에서 함께 울어주는 정치인 하나 없다면 우리는 이 을씨년스러움을 이겨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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