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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정치권이 난데없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 논란으로 소란스럽다. 김건희 여사가 지난 12일 캄보디아 방문 중 심장질환을 앓는 14세 소년의 집을 찾아가 이 소년을 안고 격려한 사진과 동영상을 대통령실이 공개하면서다.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이라고 비판하자 국민의힘에서는 인격모독이라 반발했고 16일에는 급기야 장 의원을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 빈곤 포르노는 서구의 구호단체들이 아프리카, 동남아 등 개도국 빈민 지원 모금을 유도하기 위해 이들을 동정적으로 보이도록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학술 개념이다.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의 대기근 사태가 알려진 후 각국 구호단체들은 빈곤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이미지를 모금에 활용했다. 구호단체들이 개도국 국민들을 피골이 상접한 모습, 무기력한 눈동자, 부풀어오른 배 등으로 전형화하자 이 개념이 등장했다. 에티오피아 대기근 때 모인 후원액은 1조9,000억 원에 달한다.
□ 기부 효용성을 최대한 높이는 전략으로는 성공했지만 이런 식으로 고통의 속살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사생활 침해라는 윤리 문제를 낳는다. 또한 개도국 사람들의 빈곤에는 계급, 인종, 무역정책 등 복잡한 맥락이 있는데도 빈곤 포르노는 이를 은폐하고 단순히 ‘음식이 부족한 문제’로 착각하게 할 수도 있다. ‘굶주린 아프리카인의 몸은 제3세계를 지배하는 제1세계 권력의 가장 눈에 띄는 상징’이라는 표현은 빈곤 포르노의 본질을 꿰뚫는다. 노르웨이의 학자 지원 재단이 매년 빈곤 포르노로 간주되는 모금활동을 한 자선단체를 선정해 ‘녹슨난로상’을 시상하는 이유다.
□ 김 여사의 개도국 빈곤 아동 방문을 야당이 굳이 ‘빈곤 포르노’로 지칭한 일은 용어의 선정적 효과를 노린 정치 공세로 비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내조에 전념하겠다던 김 여사가 홍보성 동영상을 배포하는 등 스리슬쩍 자기 홍보성 활동 반경을 넓혀가면서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있다. 정치권은 이를 정쟁 소재로만 삼지 말고 이참에 제2 부속실 설치 등 영부인의 외부 활동을 공적으로 통제하고 투명하게 관리할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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