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지금은 조금 고독하고 힘든 때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21일 와세다대 전현직 총장·자민당 동문 의원 등이 모인 만찬 자리에서 돌연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 대학 법학부 출신인 그가 공개석상에서 직접 괴로움을 토로한 배경은 한 달 새 각료 3명이 연달아 사임하면서 본인의 정치인생이 최대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대학선배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원래 총리는 고독한 자리”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 일본 총리는 여론조사에 임기가 좌우될 만큼 정치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 여당 의원들은 총리 지지도가 추락하면 “저런 간판으로 총선을 치를 수 없다”며 돌변한다. 합리적 성품으로 알려진 기시다가 스트레스에 더 취약하다는 비평도 있다. 역대 영국 총리들은 매주 수요일 제1야당 대표와 20분간 TV로 생중계되는 일대일 토론(Prime minister’s questions)을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로 꼽는다. 말이 토론이지 혼이 나갈 지경에 링에서 펼치는 격투기나 다름없다. 의원들은 환호와 야유를 보낸다. 일본에선 ‘당수토론’으로 불린다. 두 사람이 불과 1m 앞에 마주 선 채 승부를 겨루는 내각제 의회의 백미다.
□ 최고 권력자의 중압감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책임감과 무관치 않다. 미국의 제33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 '모든 책임은 여기에서 멈춘다(The Buck Stops Here)'라는 글귀를 놓고 일한 사례는 유명하다. 매 순간 고독한 결단과 마주치는 건 지도자의 숙명일 것이다. 때문에 대통령은 책임감에서 오는 절대고독을 인내할 정신적 힘이 있어야 한다.
□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수북이 쌓으며 밤새 고민한 박정희, 한미FTA 과정에서 지지층의 반발에 내몰린 노무현 전 대통령 모두 고독한 결단의 순간을 마다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도 올해 4월 20일 당선인 시절 예능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선거가 끝난 뒤 잠이 잘 안 온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참모들이 있지만 궁극적 결정은 본인이 하고 모든 책임을 지며 비난도 한 몸에 받는 이유에서다. 안팎으로 어려운 지금 윤 대통령이 가을밤 깊은 고독을 통해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단단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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