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얼굴을 가리고 마음을 숨기고/ 어깨를 흔들며 고개를 저어라/ 한삼자락 휘감으며/ 비틀비틀 춤을 추자’.
청년문화가 꽃을 피우던 1978년 항공대의 캠퍼스밴드 ‘활주로’는 비트가 강한 ‘탈춤’이라는 곡으로 대학가요제 은상을 차지했다. 록 음악을 통한 전통문화의 재해석을 시도한 활주로의 수상은, 1970년대 들어 각 대학에 탈춤반이 만들어지고 탈판에 학생들이 주목한 당시의 캠퍼스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탈춤이 대학가에 유입된 건 억압된 정치상황 속에 청년들이 탈춤에 내재된 현실비판 의식과 개방성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이 강했던 탈춤은 여러 전쟁 뒤 신분구조에 변동이 생긴 18세기 이후 지금의 양식으로 정립됐다. 일본의 마을축제인 마쓰리에서도 탈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신에 대한 감사가 주요 내용이다. 반면 우리의 탈춤은 비록 양반과 상인들이 후원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양반에 대한 모욕, 파계승에 대한 풍자, 남녀 간의 애정 등 서민들의 애환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했다. 가령 봉산탈춤의 '양반과장(科場)'의 주인공은 양반이 아니라 하인 말뚝이이고 하인과 양반 여성과의 성관계를 암시하는 파격적 내용도 담겼다.
□물론 탈춤이 오롯이 대학문화를 통해서 맥을 이어온 것은 아니다. 탈춤이 한국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 제도가 도입된 1964년이다. 155개의 국가무형문화재 중 종묘제례악과 함께 가장 먼저 지정돼 국가가 전승단체들을 지원했다. 한편 유일사상을 강조하며 민족전통에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북한에서는 1970년대 봉산탈춤의 맥이 끊겼다. 그러나 1985년 남북 이산가족 만남 당시 고향방문단 예술공연행사에서 우리 측이 봉산탈춤을 선보이자 이에 놀란 김정일이 봉산탈춤의 재연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후 북한에서 3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다. 남쪽의 전통문화 계승 노력이 북한을 자극한 사례다.
□탈춤이 지난달 30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라고 등재 이유를 설명했다. 차별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야말로 탈춤의 끈질긴 생명력임을 공인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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