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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중국에서 지도자의 사망은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지곤 했다. 중국 현대사에서 민중시위가 주로 별세한 지도자의 추모와 맞물려 발생한 것이다. 1976년 1월 중국인민의 ‘영원한 총리’로 불린 저우언라이가 사망했다. 이때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이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된 계기다. 시민들의 추모활동을 문혁파(문화대혁명 주도)가 억제하자 청명절 톈안먼 광장에 운집한 200만 명이 ‘문혁 4인방’을 강력히 비판했다. 군중과 민병·경찰·군병력 간 유혈충돌이 벌어진 4·5운동이다.
□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지난달 30일 타계하면서 중국에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방역정책에 대한 항의 시위와 시기적으로 묘하게 맞물려서다. 중국경제 고속성장기에 해당하는 장쩌민 시대에 대한 향수가 시진핑 체제의 코로나 확산 및 경제난과 대비된다는 분석이다. 장쩌민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으로 한때 ‘죽의 장막’이라던 국가 이미지를 바꿔놨다.
□ 역설적인 건 장쩌민이 최고권력자로 발탁된 배경이다. 그는 1989년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의 뒤를 이어 덩샤오핑이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다. 학생들의 지지를 받던 후야오방 총서기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고 덩샤오핑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6월 4일 광장에서 1만5,000명 이상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무명의 장쩌민은 베이징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동조 논조를 폈던 세계경제도보 총편집인을 해고하는 등 강경행보로 덩샤오핑의 호감을 샀다.
□ 장쩌민은 권력욕의 상징으로 통했다. 10년 주석 임기를 마치고도 권좌에서 순순히 내려오지 않았다. 후진타오에게 2002~2003년 총서기와 국가주석은 물려줬지만 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중앙군사위 주석은 2004년에야 내려놨다. 태상황(太上皇)으로 군림한 그는 시진핑에게 무너졌다.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사활을 건 암투가 양측의 동반퇴진으로 이어지면서 절대권력은 시진핑의 손에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후진타오와 시진핑의 연대가 이뤄졌고 집권 후 시진핑은 상하이방을 대거 숙청했다. 중국 정부는 6일 톈안먼 광장의 인민대회당에서 장쩌민 추도식을 거행한다. 세상을 등진 장쩌민의 마지막 위협이 될지 향후 중국 정세를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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