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외국인 A선수의 이야기다. 그럭저럭 타격이 나쁘지 않았던 외야수였는데 수비할 때 종종 몸을 던져 플라이볼을 잡아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방송 하이라이트에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런데 A선수는 재계약에 실패해 1년 만에 퇴출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문제는 수비였다. 감독은 물론 동료 선수들까지 그의 수비를 신뢰하지 않았다. 몸을 사리지 않았던 수비의 실상은 '판단·훈련·실력 부족의 종합판'이었다는 게 그들의 평가였다. 훌륭한 외야수는 타구의 소리만으로 공의 낙하지점을 판단하고, 빠른 발로 그 지점으로 이동해 안정적으로 공을 잡아낸다. 그런데 A선수는 신속한 판단력도, 빠른 발도 없었고, 훈련도 충분하지 않았다. 공이 날아오면 우왕좌왕하다 다급해진 나머지 몸을 날렸고, 운 좋게 공이 잡히면 '허슬 플레이어'로 박수를 받았던 것이다. 훈련이 잘된 외야수에겐 '평범한 플라이볼'인 타구를 A선수는 몸을 던져 잡아야 하니, 팀 동료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수비하는 야구 선수들이 '평범한 플라이볼'을 바라는 것처럼 많은 국민들이 평온한 일상을 원하지만 그건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재난·사고·갈등의 징후를 미리 포착하고, 위험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며,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집단 간 첨예한 갈등이 예상된다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조정·중재·설득해야 한다. 어떤 영역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정부, 지방자치단체, 민간 영역의 누군가가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끊임없는 반복 훈련으로 실력을 쌓은 외야수가 실점 위기의 '안타성 타구'를 '평범한 플라이볼'로 처리하는 것처럼.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 때 국민들의 평온한 일상은 깨질 수밖에 없다. 경찰·행정당국의 안전관리와 통제 부실로 발생한 이태원 참사, 수요 확대와 공급 부족을 예측하지 못한 채 모빌리티 산업의 혁신마저 가로막아 발생한 '택시 대란', 지난 6월 안전운임제를 둘러싼 갈등을 임시 봉합해 5개월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조정·중재·설득에 실패해 파업이 진행 중인 화물연대 사태….
이런 상황이 되면 정부는 강력하고 과감한 해결사가 되려 한다. 이태원 참사 당시 부실 대응했던 경찰·소방관 등을 문책하고, 화물연대에는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해 '닥치고 복귀'하도록 압박한다. 그러나 사태가 해결되더라도 한번 깨진 '평온한 일상'과 경제적 손실은 회복되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고, '강대강' 대치 중인 화물연대 파업의 손실 규모는 수조 원대다.
중국 요(堯)임금 때 늙은 농부가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가 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는 내용이다. 좋은 정치는 백성들이 나랏일 신경 안 쓰고 자기 일만 하도록 하는 것, 표시 나게 일하는 정치보다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정치가 위대하다는 뜻이다.
경제지표는 악화하는데 온 나라가 격전의 장이 돼 버렸다. 앞으로의 상황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기왕 터진 문제야 어쩔 수 없으니, 닥칠 위기만이라도 '평범한 플라이볼'로 만들어줄 정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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