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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과 전문성을 갖춘 기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영국영화협회(BFI)가 발행하는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10년마다 한 번씩 역대 세계 최고 영화 100편을 선정, 발표한다. 1952년 처음 실시된 후 70년 동안 이뤄진 일이다. 세계 여러 국가 유력 영화평론가와 영화제 프로그래머, 배급업자 등이 투표에 참가해 왔다. 순위표 가장 윗자리를 처음 차지한 영화는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이었다.
□ 1962년 이후로는 미국 감독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이 장기 집권했다. 2012년이 되어서야 1위 자리를 내놓았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1958)이 ‘시민 케인’을 2위로 밀어냈다. 컬러영화로는 1위를 첫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50년 만에 최고 영화가 바뀌었으니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시민 케인’은 언론 재벌 윌리엄 허스트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매스미디어의 시대였던 20세기에 영화평론가들이 ‘시민 케인’에 더 주목할 만했다.
□ 지난 1일 발표된 최고 영화 100편은 대이변을 연출했다. 벨기에 감독 샹탈 에케르만의 ‘잔느 딜망’(1975)이 1위에 올랐다. 여성 감독 영화로는 최초다. ‘잔느 딜망’은 2012년 36위였다. ‘잔느 딜망’은 아들을 홀로 키우는 중년여인 잔느(델핀 세리그)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잔느는 살림을 도맡아 하고 매춘으로 가정경제까지 책임진다. 힘겨운 삶을 견뎌내던 그는 갑자기 무너진다. 에케르만 감독이 25세 때 만든 실험적인 이 작품은 여성주의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최고 영화 선정자 수를 올해 대폭 늘렸다. 1,600명으로 2012년(846명)보다 2배 가까이 된다. 다양성이 강화됐다. 2012년엔 여성 감독 영화는 단 2편만이 100대 영화에 포함됐으나 이번에는 9편이었다. 흑인 감독 영화는 1편에서 7편으로 급증했다. ‘기생충’(2019)이 한국 영화 최초로 선정(90위)됐다. 지난 10년 사이 세상은 급변했다. 2017년 미투가 있었고, 여성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회는 변하고 사람들 인식은 바뀐다. ‘잔느 딜망’의 역대 최고 영화 등극은 우리가 2022년에 살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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