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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코앞에서 석유 밀수

입력
2022.12.19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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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17년 10월 19일 북한 금별무역 소속 대형 선박 예성강 1호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2375호를 피하기 위해 정유제품으로 추정되는 화물을 환적하는 모습. 미국 재무부가 그해 말 홈페이지에 게재한 사진을 캡처한 것이다. 연합뉴스

2017년 10월 19일 북한 금별무역 소속 대형 선박 예성강 1호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2375호를 피하기 위해 정유제품으로 추정되는 화물을 환적하는 모습. 미국 재무부가 그해 말 홈페이지에 게재한 사진을 캡처한 것이다. 연합뉴스

이달 1일 오후 서해상 한중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 부근 우리 해상에서 두 선박이 나란히 정박했다. 한 척은 국내 A사가 러시아에서 용선한 유조선 '머큐리호'로 지난달 20일 군산항을 떠나왔다. 다른 한 척은 홍콩 회사 소유로 지난달 12일 대만해협 쪽에서 출항한 '션들리호'였다. 몇 시간의 접선 뒤 머큐리호는 선체가 가벼워져 흘수선(수면과의 경계)이 낮아졌다. 석유를 옮겨 실었을 션들리호는 나흘 뒤 북한 EEZ 해상에서 발견됐다. 크레인 달린 바지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선박과 밀착한 모습이었다.

□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가 위성사진과 선박 신호를 토대로 포착한 북한의 정제유 밀수 정황이다. 2017년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2375호에 따라 북한은 석유와 같은 금수품을 공해상에서 환적할 수 없다. 감시가 허술해 유명무실한 제재이지만, 이번 위반 행위는 우리 관할 수역에서 벌어졌고 국내 회사가 빌린 배가 개입돼 그냥 넘기기 어렵다.

□ 이 사건을 보도한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A사는 "어선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중국인 중개인과 계약했고, 션들리호 선장에겐 화물이 북한에 양도되지 않을 거란 보증서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보증서상 상대방은 홍콩 선사가 아니라 중국 상하이에 주소를 둔 또 다른 회사였다. 3년 전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환적 거래가 의심된다며 발표한 선박 명단에 한국이 포함된 전례도 있어서인지, FT는 국내 영세업체의 대북 거래를 의심하는 유엔 관계자 발언을 인용했다.

□ 생각지도 않게 불법에 연루되는 국민도 있을 수 있다. 미국의소리(VOA)는 북한이 2019~2021년 중국이나 홍콩 회사를 내세운 위장거래로 한국에서 중고 선박을 7척 이상 사들인 뒤 북한 선적으로 바꿔 밀수에 동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배가 낡아 팔았을 뿐인데 불법 환적에 개입했다거나 북한과의 선박 매매 금지 규정(결의 2321호)을 깼다며 유엔 제재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안보리는 2017년 말 북한을 멈춰 세우려 정제유 수입량을 90% 이상 줄여 연간 50만 배럴로 제한하는 제재(결의 2397호)를 단행했지만, 북한에서 기름난만큼은 일어날 조짐이 없다. 대북제재의 가장 큰 구멍이다.

이훈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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