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기자가 되고 '기자 없는 기자회견'에 종종 자리했다.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확히는 나를 제외하면 취재하려는 사람이 없는 기자회견이었다. 기자가 없는 기자회견의 주체는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장애인, 페미니스트, 노숙인 등 그때그때 달랐지만, 교집합은 분명했다. 바로 사회적 소수자·약자라는 점이었다.
아무도 취재하지 않는 사건을 혼자 알아보고 기사로 쓴다면 특종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권력자의 일이었다면 취재 과정에서 일종의 희열마저 느낄 테지만 약자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사회적 약자가 연 기자회견에 기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무엇보다 겁이 덜컥 났다. '취재 가치가 없는 일'에 헛심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다. 다른 기자들이 회견장에 오지 않은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들의 이야기를 깐깐한 잣대로 바라보게 됐다.
지난해 12월, 강추위 속에서 홀로 참석했던 기자회견은 서울시 산하 한 재단 콜센터 상담사들의 저임금을 개선하자는 내용이었다. 서울시는 상담사들의 인건비로 생활임금 이상을 책정하고 식대·교통비도 줬으나,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이를 받지 못했다. 며칠 후 열린 장애인 이동권 관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선전전과 여성가족부 폐지에 반대하는 여성단체의 기자회견에도 기자는 없었다. 지난달 옷차림을 이유로 국회 출입을 제지당한 노숙인이 이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모두 기사로 낼 쓸모가 없는 이야기들이었을까.
먼저 언론인으로서 변명하자면, 기자 없는 기자회견은 불가피하다. 신문사에서 노동을 담당하는 기자는 보통 2~3명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복지나 환경 등 다른 출입처를 동시에 맡는다. 노동단체뿐 아니라 정부, 산하 기관까지 매일 수건의 기자회견이 열리니 모든 자리에 기자가 갈 순 없다. 더구나 늘 새로움을 찾는 언론에 비정규직 노동자와 장애인, 여성, 노숙인 차별은 새롭지 않다.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집단으로 묶인 이유가 차별받는다는 전제 아니던가. 나 역시 남과 다른, 정의로운 기자정신으로 이들의 기자회견장에 간 것이 아니라 속한 팀이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마이너리티팀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 없는 기자회견에는 한 사람의 기자라도 있어야 한다. 최근 취재를 위해 만난 노숙인에게 홀로서기를 위해 가장 필요한 지원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일자리나 주거지원, 생계비 등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언론사가 노숙인에게 지속해 관심을 좀 보여주면, 매일 신문에 나올 순 없겠지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요. 나라님도 가난을 해결할 순 없다지만 그래도 관심을 가져야 하잖아요. 언론사는요." 이 노숙인은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달라진다"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비정규직 콜센터 상담원의 기자회견에 다른 기자가 없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워 이를 보고하자 부장은 "너라도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그분들에겐 많은 응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숙인 인권단체의 활동가는 "취재를 나와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전했다. 현장에 취재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이유로 불안을 느끼던 나는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 앞으로도 어디선가는 기자 없는 기자회견이 열리겠지만, 누군가는 곁에 서 있기를 바라보는 겨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