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패에 일희일비하는 전장(戰場)에서도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웃음꽃이 핀다. 대중문화와 스포츠의 황금기라 불린 1990년대. 겨울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 시절의 주인공이었던 지금의 프로농구 감독들은 추억을 곱씹는다.
'슛도사' 이충희, '람보슈터' 문경은, ‘매직히포’ 현주엽.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득실한 '무림 고수'들의 향연 같았다.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직전인 1990년대 초중반,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겨룬 농구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오빠 부대’가 등장했고,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제작됐으며, 태평양 건너에선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 신드롬까지. 누구든 집에 농구공 하나쯤은 있었고, 학교 운동장에선 농구 코트 차지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지만 고가의 농구화까지 장만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 시절 대한민국의 농구 광풍은 실로 대단했다.
관객 300만 명을 돌파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장년층에게 각인된 그 추억들을 깨웠다. 원작은 중고생들의 '필독서'였다. 영화의 관객 연령별 예매 분포(CGV 기준)를 보면 20대 18.7%, 30대 38.6%이며, 성별 분포 또한 여성이 47.5%라니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고 있다는 얘기다. 10대에 추억의 만화책을 봤던 3040의 향수를 저격하고, MZ세대가 함께 열광한 덕이다.
현실의 농구는 어떤가. 경기를 직관했다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프로농구 인기가 떨어진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2018~2019시즌에 0.1%대(0.19%)로 떨어진 시청률은 2022~2023시즌에는 0.10%까지 내려온 상태다. 코로나19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 관중 수도 3,000명 선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올 시즌부터는 네이버, 유튜브 등을 통한 중계도 막혀 접근성이 더 열악해졌다. 예능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 중인 한 농구인은 "현장에 있을 때보다 방송에 출연하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과거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방영됐을 때 농구 인기가 많아진 것처럼 농구계가 미디어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농구의 추락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인물'의 부재가 아쉽다. 한국농구연맹(KBL)과 각 구단들이 나서 다각도로 스타 마케팅을 해 봤지만 터닝포인트가 참 요원하다. 요즘 농구팬들에게 떠오르는 스타를 꼽으라면 허재의 두 아들인 허웅, 허훈 형제밖에 더 있느냐고 되묻는다. 농구대잔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올드팬들도, 강백호와 같은 영웅을 현실에서 보고 싶은 MZ세대들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또 '농구대통령' 허재를 내세워 이슈몰이를 해 보려 했지만 구단(고양 캐롯)이 경영난으로 백기를 들고 말았다.
동시대에 농구에 버금가는 전성기를 누린 프로야구도 위기가 있었지만 국제대회 선전과 새 구단 창단 등 덩치를 키워 꾸준히 스포츠 뉴스의 중심에 섰다. 축구는 손흥민과 월드컵 16강으로, 여자배구는 김연경과 올림픽 4강을 밑천으로 버티고 있다.
1990년대 들끓는 청춘들의 열정만으로 정점을 찍었던 농구는 시대의 변화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처해 왔던가.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에서 뚝 끊겨 버린 레퍼토리의 부활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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