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9화에 유대인 캠프가 등장한다. 피골이 상접한 수용자에게 미군 병사가 음식을 나눠 주지만, 군의관이 달려와 회수를 독촉한다. 굶은 상태에서 급히 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문 영역에서는 일반 상식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걸 보여준 사례다.
□거시경제학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 개별 경제주체의 최선 행동이 국가 전체로는 해가 되는 ‘구성의 오류’ 상황이 존재한다. ‘저축의 역설’이 대표적이다. 월급을 쓰지 않고 저축을 늘릴수록 소비가 위축돼 경제가 나빠지는 경우다. 물론 제한된 시야와 정보 부족으로 선량한 일반 시민은 ‘구성의 오류’를 알기 어렵다. 개별 데이터를 한눈에 조망하는 위치에서나 그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다.
□‘구성의 오류’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올바른 정책이지만, 민심을 거스르면 정치 생명이 끝나기 때문이다. 간혹 예외는 있었다.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하원의원이던 1964년 위기를 맞는다. 공정주택법에 찬성표를 던져서다. 백인 집주인의 흑인 세입자 차별을 금지한 법안인데, 지역구(텍사스 휴스턴)에선 반대 여론이 거셌다. 법안이 통과되자, 협박전화가 빗발쳤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부시 의원이 설명회를 열었다. “베트남전 흑인 병사들은 귀국 후 결혼해 집을 갖는 게 소원이다. 흑인이라고 차별받아야 하나. 이 법이 인기 없다는 건 잘 안다. 그러나 이건 옳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항의하던 유권자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안타깝게도 지구상 대부분 유권자는 60년 전 휴스턴 시민과 다르다. ‘구성의 오류’를 알더라도, 민심을 거스른 정부에 저항한다. 연금개혁에 나선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민심과 대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주 연재 중인 ‘3대 개혁’ 기고를 정리하면서, 우리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운명도 마크롱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려면, 미래세대를 위해 많은 국민은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악역 떠맡는 게 이 시대 대통령의 숙명이고, 욕을 부르는 결단 앞에서 그가 머뭇거리지 않도록 하는 건 책임 있는 언론의 역할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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