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일생을 남겨진 원고를 지키는 데 허비한 엄마를 보며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뛰쳐나간 딸 호프. 전쟁 후 세상은 그에게 더 큰 상처만을 주고 다시 돌아온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일상이 무너져버린 삶, 그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것이 엄마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원고뿐이라면 호프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2019년 초연해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예그린뮤지컬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뮤지컬 '호프'가 한층 간결하고 명료해진 세 번째 시즌을 맞고 있다. 이 작품은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 반환 소송을 모티브로 평생 원고를 지키며 살았던 괴상한 노인 캐릭터 호프의 삶을 되돌아본다.
자신을 가꾸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70대 노파 호프는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악취를 풍겨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현대문학의 거장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를 보관하고 있는 호프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이스라엘 도서관 측과 30년째 지루한 법정 공방을 펼치고 있다. 막대한 사례금을 제공하겠다고 하는데도 호프가 왜 원고를 내어 주지 않고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지, 작품은 현재의 법정과 과거를 오가며 호프의 기구한 삶을 재현한다.
무대는 요제프 미발표 원고의 소유권 다툼을 다루고 있는 법정을 형상화했다. 70대 노파 호프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과거의 환영을 보기도 하고, 남겨진 원고를 의인화한 K와 대화를 나누며 이곳에서 자신의 과거를 풀어낸다. 법정 무대는 요제프의 원고 소유권을 다투는 자리이자 호프의 일평생 삶을 평가하는 자리가 된다.
어린 시절 호프는 엄마를 좋아하고 평생을 함께 있고 싶어 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엄마 마리에게 연인 베르트가 요제프의 미발표 원고를 맡기고 가면서 마리와 호프의 인생이 달라진다. 전쟁 통에 헤어져야 했던 마리는 포로수용소에 갇혀서도 원고를 딸 호프보다 아끼며 연인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살아간다. 책에 인생을 맡겨 버린 엄마를 보며 호프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믿었던 첫사랑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머지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은 관계의 연속이었다. K가 '집을 나간 나그네'를 부르는 동안 젊은 호프의 집을 떠나온 고단한 삶이 호프와 그림자 남자들의 2인무로 펼쳐진다. 호프는 남자들이 바뀔 때마다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 가고 수동적이 된다. 여러 번의 2인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고집스럽고 고단한 70대 호프 이미지를 그대로 지닌 모습이 된다. 엄마의 삶과 자신의 삶마저 송두리째 바꿔버린 원고.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 그것뿐이라면? 호프는 저주와 같은 지긋지긋한 엄마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러나 작품은 호프를 비극의 수렁에 남겨둔 채 끝나지 않는다. 과거의 여행은 스스로를 읽히지 않은 책으로 남겨 뒀던 자신의 인생에서 희망을 품었던 순간을 보여준다. 책과 함께 묶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을 향한 문 앞에 몇 번이고 서 왔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굴레를 풀고 세상으로 나서는 그에게 K의 노래 '빛날거야 에바 호프'는 이름처럼 희망찬 찬가가 되어 그를 배웅한다.
뮤지컬 '호프'는 엄마 마리로부터 호프로 이어지는 집착의 굴레를 설득력 있는 플롯으로 제시했다. 과거의 자신을 지켜보며 당시의 아픔을 재경험하는 노파 호프의 고통이 생생하게 재현돼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고 물건이 의인화된 K라는 캐릭터는 극 전개를 흥미롭게 돕는다. 무엇보다도 인물의 감정을 적재적소 효과적으로 표현한 음악은 뮤지컬의 매력을 한껏 전해준다. 특히 과거 호프의 일대기를 마치고 스스로를 "원고만 남은 여자"라고 인식하며 부르는 '호프'라는 곡은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호프의 심정을 꾸미지 않고 갈라지는 고음으로 절규해 관객들을 숙연하게 했다. 필자는 호프 이혜경, 과거 호프 김수연, 마리 홍륜희, K 김경수 캐스팅으로 관람했는데 고운 음성에 연륜이 담긴 이혜경 호프와 은근한 솔(soul) 기운을 주는 김수연 과거 호프, 청량하게 뿜어내는 홍윤희 마리, 따뜻한 중저음의 김경수 K의 하모니를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높았다. 극과 잘 맞물린 음악과 이를 그 이상으로 잘 소화해 주는 배우들의 열연으로 무대와 객석을 숨죽여 흐느끼게 한다. 6월 11일까지 유니플렉스 1관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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