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투명하게 공개되는 거래가
②'대출 부풀리기' 어려운 편
③대량 매수하기엔 비싼 집값
‘전세사기’가 빌라·오피스텔(주거형)에 집중되면서 경제력이 떨어지는 서민·청년층의 피해가 더 커지고 있다. 반면 대규모 아파트 세입자는 화를 면했다. 시세조종이 용이한 부동산인지 여부가 이 같은 ‘빈익빈’(貧益貧) 현상의 주요인이 됐다는 게 부동산 시장·법률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대규모 아파트는 거래사례가 많아 평균 시세가 확고한 편이다. 거래가 활발하니 주택담보대출금이나 전세자금대출금을 내주는 은행에 거래가가 대부분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관련 인터넷 사이트나 응용 소프트웨어(앱)를 통해서도 이 같은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게다가 대규모 아파트는 분양가가 공개되고, 분양가 상한제의 적용을 받는 지역도 있다. 사기꾼이 마음대로 매매·전세가를 올리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반면 소규모 빌라·오피스텔은 시세가 상대적으로 불분명해 실제 가치보다 과대평가되기 쉽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은 “(빌라·오피스텔은) 평형, 집의 구조부터 제각각이어서 주변 시세와 비교하기 어렵다”며 “특히 신축 빌라·오피스텔이 대규모 아파트와 달리 ‘전세가 부풀리기’를 하는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기 쉬운 이유”라고 설명했다.
먼저 사기꾼은 허위거래를 통해 이들 부동산의 매매가를 부풀리는 경우가 많다. 집값이 올라가면 전세자금대출금도 따라 뛰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적정 매매가가 2억 원인 집을 허위거래를 통해 3억 원으로 부풀린 뒤, 집주인에게 전세자금대출금을 집값의 90%까지 내줬던 과거 기준으로는 2억7,000만 원을 수중에 넣게 되는 구조다. 세입자가 낸 전세금으로 분양 비용과 매매 비용을 치르는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가 가능해지는 이유다.
“값싼 빌라·오피스텔, 사기꾼이 대량 사들여 ‘돌려막기’ 하기 쉬워”
문제는 집값이 하락하는 시기에 발생한다. 사실상 무자본으로 이 같은 일을 벌인 사기꾼은 세입자가 빠져나가면, 함께 가격을 부풀린 다른 세대의 전세금을 빼서 내주는 ‘돌려막기’를 한다. 하지만 부동산 시세가 하락할 때는 이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진다. 값이 떨어진 다른 주택을 찾아 이사 가려는 세입자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전세자금대출금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진다. 차명으로 이 같은 부동산을 보유한 사기꾼 일당은 물론, 전세보증금을 날린 세입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까지 나오게 된 이유다.
대규모 아파트의 매매·전세가가 통상 빌라·오피스텔보다 비싸다는 점도 대규모 아파트 세입자가 전세사기를 비껴간 근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아 사기꾼이 대량매수해 시세조정을 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아파트는 시행사, 시공사 등 건축에 관여하는 이해관계자가 많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분양가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어렵다. 평형, 집의 구조가 비슷해 주변 시세를 활용한 적정가 평가도 쉽다. 은행이 대출을 위해 감정평가를 거친 적정 매매가도 대부분 일반에 알려진다.
하지만 사기꾼이 손을 뻗친 신축 빌라·오피스텔은 상대적으로 소액이기 때문에 건물 전체의 실소유주가 한 사람이고, 인근의 비슷한 부동산도 같은 사람이 실소유한 경우가 많다. 주변 시세도 동일인에 의한 ‘전세가 부풀리기’가 이뤄져 있어 적정 매매가 평가가 어려운 것이다. 이 경우 근저당 설정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을 세입자가 의심해도 사기꾼 일당과 결탁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이 동네는 원래 다 그래”란 식으로 무마해 전세계약을 체결하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부동산 하락세가 나타나면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회수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 경우 변제 우선권이 은행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 부동산은 분양가상한제 적용도 받지 않는다. 대규모 아파트와 달리 사기꾼이 대출금을 부풀리기 위해 거래가를 올리기 쉬운 여건인 셈이다.
“정부·지자체, 민간 협력해 시세정보 조사·제공해야”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정부·지방자치단체가 금융기관 등 민간과 협력해 빌라·오피스텔도 적정 매매가·전세가 등 시세정보를 조사해 자세히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감정평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은행이 빌라·오피스텔을 담보로 대출하는 경우에도 감정평가를 평가사에 복수로 맡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전세사기가 횡행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대로 된 감정평가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국가 공인 감정평가 센터를 만들어 빌라·오피스텔도 제대로 된 감정평가를 받도록 하는 제도 보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문도 한국부동산산업학회 상임이사는 "이들 부동산의 공시지가는 나와 있지만, 건축비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따라서 지가에 건축비를 산입해 적정 거래가를 계산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세 안정을 도모하는 노력도 병행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국가·지자체가 집주인의 채무, 담보, 압류 정보 등을 세입자에게 명확하고 자세하게 알리는 제도 보완도 요구된다. 사기꾼과 결탁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세입자에게 근저당권을 포함한 집주인의 채무, 담보, 압류 등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 전세사기가 불거졌을 때 제대로 보호받을 수 없는 부동산의 전세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민수 변호사(법무법인 동인)는 “일부 부동산 업자는 말소사항이 포함되지 않은 등기부등본을 세입자에게 제시해 세입자가 경매에 나왔던 물건이란 사실을 모르거나, 근저당 설정 사실조차 모른 채 전세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전세금 부풀리기’ 원인 전세자금대출 없애야 세입자 피해 줄어든다”
공공주택을 더 많이 공급해 서민·청년층의 전세 수요 자체를 줄이려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일 팀장은 “LH 등이 임대주택 등 공공주택 공급을 늘리면 일단 전세가가 하향 안정화될 수 있다”며 “서민, 청년층이 공공주택에 더 많이 입주하게 되면 부풀려진 전세금을 내고 민간 사업자에게 보증금 회수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위험부담을 지는 경우도 줄어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전세자금대출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게 근본대책이란 주장도 있다. 사기꾼이 ‘전세금 부풀리기’를 하는 목적이 전세자금대출금을 더 많이 받아 자산을 늘리려는 데 있기 때문에, 이를 원천 차단하자는 것이다. 전세자금대출을 목적으로 한 주택의 전세가가 부풀려지면, 인근의 전세가도 따라 올라가 세입자의 주거안정을 해치기도 한다. 특히 이는 부동산 시세 하락장에서 세입자의 피해액을 더 키우는 원인이 된다.
한문도 이사는 “세계적으로 전세 제도는 한국 외에 볼리비아, 인도 등에만 존재하며 전세자금대출이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며 “전세대출 자체가 사금융인데 (전세자금대출 제도를 통해) 공공이 개입하도록 한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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