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희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저와 아이들을 뒷전으로 생각하는 남편 때문에 너무 괴로워요. 살다보면 다툴 일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입을 닫아버려 저만 속이 탑니다.
오랜만에 부서 회식에 참석한 날이었어요. 육아 때문에 거의 참석하지 못하다가 그날은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기로 해서 회식 자리에 갔다가 밤 11시가 넘어 귀가했죠. 들어가니 남편이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아프다고 하더군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자고 일어난 아침, "열이 많이 난다"는 남편의 말에 불안한 예감이 들어 코로나19 검사를 해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아픈데 챙겨주기는커녕 검사해보라고 한다"며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제 예감은 적중했죠. 남편이 양성 판정을 받고 나서 격리를 시작했고, 그 이후로 저의 독박육아가 시작됐습니다. 다음 날 첫째가 확진이 됐고, 둘째마저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남편은 자기 먹을 음식 챙기기에 급급했어요. 첫째가 확진이라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방에서 나오는 남편을 보고 욱해서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격리 중에 싸우는 게 싫어서 먼저 화해를 청했지만 계속 시큰둥한 태도였어요. 둘째와 제가 확진이 됐고, 남편은 그 후로도 저나 애들을 챙겨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방으로 문을 잠그고 들어가 틀어박혀 있는 남편을 보면서 또 욱한 마음이 생겼고, 충동적으로 문을 부숴버렸어요. 남편은 아무말 없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또 저 혼자 아픈 아이들을 돌봐야 했죠. 늘 이런 식입니다. 다툼이 있고 대화가 필요한 순간엔 늘 침묵하고, 피하기 바빠요.
언젠가 제가 약속으로 나가야 하는 날,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나가버렸습니다. 전화를 했지만 응답이 없었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저는 남편 짐을 싸서 시댁에 보내버렸어요. 그날로부터 한 달가량 집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저는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들을 혼자 돌봤죠. 지칠 대로 지친 저는 결국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들어와서 가만히 있다가 아침에 출근해버렸어요. 집안 꼴은 엉망이지만 치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식구들끼리 끈끈하게 지내고, 스스럼없이 대화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이 늘 바쁘셨기 때문에 다섯 형제가 똘똘 뭉쳤죠. 부모님의 자리를 대신해 의지하며 서로를 돌봐주면서 지냈어요. 지금도 형제들과 사이가 좋고 조카들과도 잘 지내는 편입니다.
제 입장에선 남편 행동이 이해되지 않고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집니다. 남편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저는 일도 하고, 집안일과 돈 관리까지 책임져야 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대화를 시도하면 아이들 앞에서 싸우기 싫다며 피하기 바쁩니다. 눈앞에 분명 문제가 있는데 말을 꺼내려는 시늉만 해도 막아요. 독박육아도, 살림도 힘이 들지만 무엇보다 저 스스로도 날로 우울감이 커집니다. 가정을 같이 꾸렸는데 왜 제가 모든 걸 짊어지고 살아야 하나요. 이런 사람과 이혼이 답일까요.
김세연(가명·36·회사원)
세연씨, 서로 좋아서 결혼했지만 누구에게도 어려운 게 결혼생활인 것 같습니다. 일단 부부가 각자의 성향이 다르고,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갈등이 생기지요. 세연씨 부부는 그 부분에서 차이를 크게 느꼈을 거예요.
세연씨 입장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 좀처럼 마음과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죠. 육아와 살림을 혼자 떠안은 채로 워킹맘으로 살면서 얼마나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사연을 보면서 지난 수년간 세연씨가 남편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로 얼마나 치열한 생활을 이어왔을지 그려져 안타까웠습니다. 그렇다고 부부간의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하면 두 사람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결혼생활을 하면서 세연씨가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게 된 원인들을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죠.
먼저 세연씨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세연씨 남편은 회피성 성향이 강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타인과 가까워지고 친밀함을 유지하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 풀어가는 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죠.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대화를 피한다고만 했었지요. 세연씨는 남편이 문제 상황에서 도망쳐 자기 자신만 돌보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만 남편은 극도로 회피적인 사람이에요. 갈등을 직면하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갈등 상황에서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화해서 간격을 좁혀나가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닌 것이죠.
남편의 유년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성장 과정에서 이런 성향이 차츰 강화됐을 거예요. 그런 자신의 미숙한 관계 패턴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결혼을 했고 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과의 소통이 여전히 어색할 거예요. 회피성 성향이 강한 사람은 조용하고 안정적인 감정을 추구합니다. 갈등 상황에서는 상대방이 준 자극에 동요당하지 않기 위해 그에 대한 감정 인식 스위치를 아예 꺼버리는 것이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반면 세연씨는 남편과 정반대 성향이죠. 세연씨 부부는 역기능적 의사소통을 하는 흔한 부부 유형인 '회피형 남편'과 '추격형 아내’ 유형입니다. 남편이 '회피형'이라면 세연씨는 '추격형'에 가까워요. 추격형 성향의 사람은 매사에 예민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감정적으로 밀착해 모든 일들을 공유하고 함께 해결해가길 원합니다. 세연씨도 처음에는 남편이 배우자로서 진심 어리게 세연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짐을 나눠 들어주기를 원했지요. 그 바람은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에요. 다만 남편은 기분과 감정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세연씨가 긴밀한 연결을 요구하거나 좌절해서 감정적인 행동을 할 때 결국 회피를 해버립니다.
세연씨 입장에서는 ‘남편이자 아빠로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는 분노감, '내가 이런 대접을 받나' 하는 수치심과 좌절감이 쉽게 생길 수 있어요. 하지만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대 탓을 하다보면 오해의 여지도 커지고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실제로 남편 입장에선 세연씨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거나 통제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세연씨가 다가올수록 더 강력하게 침묵과 무시로 대응하는 것도 그래서죠.
세연씨 부부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선 악순환되는 상호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해요. 회피형 남편은 회피형 애착 유형으로 사람과의 긴밀한 연결을 피하려 하고 독립성을 유지하며 감정적 취약성을 피합니다. 반면 추격형 아내는 불안형 애착 유형으로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구가 좌절될 때에,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과도하게 의존적이거나 집착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부부 모두 과민해진 감정을 다루고자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되고 쫓아오니 도망가고, 도망가니 더 쫓아가는 식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부부라도 서로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성향이나 애착 스타일이 쉽게 바뀔 수는 없어요. 다만 두 사람의 다른 점을 인식하고 덜 도망가고, 덜 쫓아가는 노력을 하면 조금씩 관계가 개선될 수 있습니다. 부부 모두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같지만 갈등이 생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안정적인 소통이 아닌 양극단의 방식인 것입니다.
부부의 갈등 상황이 반복되면 아이들 역시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에 노출되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아이들이 회피와 집착이라는 부모의 감정 처리 방식을 배우게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겼을 때 옳고 그름을 가려 성급하게 종결시키려 애쓰기보다는 부부간 감정 소통에 중점을 두길 바랍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그런 소통 방식을 배우게 될 겁니다. 이혼 고민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근본적인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본 후에 결정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연씨의 심리적 안정감과 행복을 바라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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