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
모두가 ‘예스’를 말할 때 나홀로 ‘노’를 외친 사람. 토머스 호니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그런 인물이다. 무려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 앞에서, 그것도 여섯 번의 주요 투표 동안, 심지어 버냉키 정책을 “악마와의 거래”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때는 2010년이었다. 미국 경제는 비실비실했다. 2008년 금융위기 여파였다. 버냉키는 ‘해결사’가 되고자 했다. 금리를 ‘제로’(0%) 수준까지 낮추고, 장기 채권을 대거 매입하는 ‘양적 완화’를 추진했다. 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표결에서 호니그는 내리 말했다. “정중히 반대합니다.” 그는 양적 완화가 계속되면 자산 거품을 키우고, 중산층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연준 위원은 버냉키의 편이었다. 매번 투표에서 11대 1로 참패했다. 이후 경기 부양이 효과를 내는 듯 보이며 버냉키는 영웅, 호니그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13년이 지난 지금 평가는 어떨까. 책 ‘돈을 찍어내는 제왕, 연준’에 답이 있다. 참고로 책의 부제목은 ‘미국 중앙은행(연준)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망가뜨렸나’이다. 경제 전문기자 크리스토퍼 레너드가 호니그 등 연준 내부 인물을 취재해 연준의 은밀한 작동 방식을 드러냈다.
연준은 2008년 말부터 2010년 초 사이에 1조2,000억 달러를 찍어냈다. 정상적인 속도로는 100년에 걸쳐 늘었어야 할 액수였다. 불행히도 이 돈은 호니그의 우려대로 움직였다. 기업 투자나 소비 촉진이 아니라, 월가로 흘러 들어갔다. 이들은 부동산, 주식, 복잡한 금융 상품에 투자해 천문학적 돈을 벌었다. 제로 금리 시대, 월급을 받아 저축하며 살아가는 미국 중산층은 더욱 가난해졌다.
여론마저 연준 편을 들었다. 금리를 올리자는 ‘매파’의 주장보다, 돈을 풀자는 ‘비둘기’파의 주장이 더 서민을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동산ㆍ주식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경제가 호황이다’는 착시에 빠졌다. 연준은 거칠 게 없었다. 경기가 부진하다 싶으면, 돈을 풀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도 그랬다. 제롬 파월 현 의장은 두 달여 만에 3조 달러를 찍었다. 이는 300년 동안 늘었어야 할 화폐량이다.
저자는 말한다. “연준의 구제 프로그램이 효과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특정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자산, 주식 소유자들은 팬데믹 붕괴 이후 9개월간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고, 기업 부채 소유자도 마찬가지였다.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수백만 명이 퇴거 위험에 처하고, 식당들은 문을 닫고,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 와중에, 부채 시장과 주식 시장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물론 프랭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도 대공황 이후 시장에 돈을 푸는 ‘뉴딜’ 정책을 폈다. 투표로 선택된 정부가 투명한 과정을 거쳐 절차대로 진행한 결과였다. 연준은? 마음껏 돈을 찍어내는데 작동 과정은 불투명하다. 연준은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경제적’ 해법을 제시하는 척하면서,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린다.
재미있는 내부 이야기도 많다. 가령 연준 발표를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운데, 영어 탓이 아니다. ‘천재 수준 의사결정자들이 모인 집단’으로 추앙받기 위해 일부러 외계어같이 어려운 연준어(語)를 쓴다. 호니그의 ‘반대표’도 이례적인 일이다. 연준 투표는 다수결로 결정되는데, 물밑에서 만장일치를 위해 노력한다. '우리 결정은 이견이 없어 신뢰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호니그가 반대표를 던진 건 “연준 내에서도 돈 풀기 정책의 위험성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대중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파월 의장이 연준에서 일하기 전 대형 사모펀드 칼라일그룹에서 근무하며 엄청난 이익을 챙긴 점도 지적한다.
아직도 최근 인플레이션이 코로나19나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일독을 권하는 책. 연준이 미국 시장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왜 연준 때문에 전 세계가 불안정한 미래에 직면했는지, 파월 의장의 ‘한마디’에 한국 금융시장이 출렁이는지 알 수 있다. 연준이 2008년 미국 경제를 좌우하도록 내버려 둔 대가를 “아직 다 치르지 않았다”는 울적한 현실도 알게 된다. 책은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스 등 진보ㆍ보수ㆍ경제 매체 모두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진보ㆍ보수 진영을 망라하고 연준을 경계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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