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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은 참지 말고 끝까지" … 인권변호사 이태영은 그렇게 성차별에 맞섰다

입력
2023.06.02 10: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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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문화재단 음악극 '백인당 태영'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제공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제공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실망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어린 태영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난감한 절망감을 느꼈다. 태어나 보니 여자인 것을 어쩌라는 것이냐. 일곱 살의 태영은 웅변 연단에 올라 "이건 못 참는다"고 크게 소리치는데 우레 같은 환호 소리에 말을 마치지 못하고 내려온다. 그때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 "어떤 칭찬이나 비난이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 참지 말고 끝까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루한 관습과 싸워나갔던 인권변호사 이태영(1914~1998)의 투쟁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목소리 프로젝트 3탄 음악극 '백인당(白人堂) 태영'(박소영 연출, 이선영 작곡, 장우성 작)은 호주법을 폐지하기 위해 평생 헌신했던 인권변호사 이태영을 주목한다. 목소리 프로젝트는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선정, 그와 관련된 말과 글을 담은 자료들을 기초로 그의 삶을 무대에 올리는 기획이다. 첫 번째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엮은 '태일'을, 두 번째로는 '섬: 1933~2019'를 통해 소록도에서 나환자를 위해 평생을 봉사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백인당 태영'은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해 한 배우가 이태영 변호사와 당시의 목소리를, 다른 배우는 그 외 다수의 역할과 이 시대의 목소리를 맡는다. 초반부는 불평등한 여성의 삶을 각성하는 이태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적 차별의 문제를 고민하게 한다. 특히 올케를 친언니로 착각했던 태영의 일화는 가족 체계 내부에 짙게 깔려 있는 불평등을 실감하게 한다. 올케가 친언니가 아니면 남이고 손님인데 왜 올케만 빨래며 밥이며 집안일을 다 시키냐며, "엄마가 하라우"라는 태영의 일갈에 웃음이 나면서도 우리 일상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부장적 사고에 섬찟해진다. 여전히 많은 가정에서 제사상을 준비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집안 출신인 엄마와 며느리, 여성들이다. 현재도 이러한 가부장적 제도와 의식은 현실에 밀접하게 녹아들어 있다.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제공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제공

후반부는 여성 인권 운동을 벌이는 활동에 집중한다. 태영은 사력을 다해 아이 셋을 둔 법관이 되지만 남편이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이유로 판사 임용에서 제외된다. 이후 변호사로 나서 다양한 여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돕기 위해 여성법률상담소를 운영한다. 그는 여성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호주법을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주법은 한 가정의 권리는 아버지에서 장자로 이어져서 아버지가 부재 시 집안의 주인은 나이에 상관없이 아들에게 주어지게 하는 법이었고, 남자와 여자의 친족 범위가 다르고 혼외자를 입적할 때 남편은 아내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아내는 남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조항을 떡하니 규정해 놓은 법이다. 작품은 호주법의 폐해와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강의식으로 쉽게 설명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남녀차별의 현실과 이에 맞선 이태영의 지난한 싸움을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유림을 비롯한 가부장적 어른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고, 변호사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며, 함께 힘을 모았지만 현실적인 타협안을 받아들이려는 동료들과 갈등을 빚기도 한다. 그렇게 숱한 고난에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그의 노력으로 1989년 호주법은 사실상 무력화되고 그로부터 16년 후인 2005년 호주법이 완전히 폐지된다. 그가 사망한 지 7년 후의 일이다. 작품에서는 개정된 가족법 내용을 영상으로 비추며 어떤 문구들이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채 열 줄도 안 되는 문구를 수정하기까지 1948년 이후 2005년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역사는 허망하지만 발전하고 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이태영 변호사는 어린 시절 웅변대회에서 얻은 교훈처럼 누가 뭐라고 하든 옳다고 생각한 일은 끝까지 해냈다. 그렇게 내디딘 변화의 걸음으로 우리는 조금 더 평등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태영 변호사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뿌리 깊은 성차별의 역사에 대해 눈을 뜨는 동시에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6월 18일까지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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