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전세로 살았던 신도시의 아파트는 있어야 할 철근이 대거 빠져 있어 난리가 난 곳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뼈 없는 ‘순살아파트’가 되겠다. 수사 결과 하도급업체가 철근을 빼돌리고 고의로 듬성듬성 박은 사실이 드러났다. 가담자는 사법처리를 받았고, 뒷돈을 받은 감리 관계자도 기소됐다.
그러나 아파트는 재시공 없이 살아남았다. ‘철근은 빠졌어도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가 정밀조사 결론이었다. ‘음주는 했어도 음주운전은 아니다’와 다른 게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약간의 보강공사를 거쳐 입주가 시작됐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우리 가족은 “조경이 좋다” “아파트가 풀옵션이네”(옵션은 수분양자들을 달래는 수단이었다) 하면서 신나게 이사를 갔다. 집주인이나 부동산중개소는 철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 아파트가 ‘순살’에 가까웠단 사실은 동네에 사는 분과 우연히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된, 지역에선 사실 쉬쉬하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최근 검단에서 터진 붕괴 사건을 보고, 예전 전세를 살던 그 아파트의 최근 매매가와 호가를 찾아봤다. 옆 단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부동산 가격은 칼같이 정확하게 입지·환경을 반영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철근 이슈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거의 잊힌 걸로 보인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몇 번 손바뀜도 있었을 것이며, 살아 보니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신도시 계획에 차질을 빚고 싶지 않았던 행정청, 부수고 다시 짓는 것보다 조경·옵션으로 무마하면 싸게 먹힐 거라 봤던 건설사, 집값 떨어질라 쉬쉬해야만 했던 집주인들의 '뚝심'이 승리한, 매우 한국적인 결말이다. ‘자재 빼먹기’가 널리 퍼진 관행이라 본다면, 차라리 이렇게 걸려서 보강공사라도 거친 아파트가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검단 사건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재시공하기로 했으니 지금까지완 다른 것 아니냐고. 보강에 그치지 않고 아예 다시 짓기로 한 걸 보면, 세상은 좀 나아진 거 아니냐고.
전혀. 구조물 붕괴가 없었다면 과연 수천억 원을 들여 다시 짓겠다는 말이 순순히 나왔을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사고를 본 여론이 불타올랐고, 언론의 집중 취재가 시작됐고, 관계기관의 비상한 관심(특별점검·세무조사)이 쏠리게 됐기 때문이다. 감리나 점검의 결과로, 짓던 아파트를 부수고 재시공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다. 뒤집어 말한다면, 붕괴와 같은 극단적 사례가 없으면 재시공 같은 근본 대책이 나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얘기가 된다.
업체 잘못에 따른 책임을 애먼 불특정 다수가 나눠 진다는 것도 달라지지 않은 점이다. 관리·감독·감리가 부실을 잡지 못한(않은) 결과, 손해를 보는 쪽은 해당 아파트 입주자, 그 브랜드의 다른 아파트를 가진 소유주, 해당 건설사 주주 등이다. 붕괴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부실에까지 가장 무거운 책임을 물리는 선례가 확고히 자리 잡지 않는다면, 이번 재시공과 상관없이 건설현장에서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재연될 게 뻔하다.
우리가 이걸 또 덮어 두고 그냥 간다면, 이렇게 이어지는 법원 판결을 또 지켜봐야 할 거다.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 수분양자 등에게 큰 손해를 끼친 점에 미루어 피고인들을 엄벌할 필요가 있다. 다만 피고인들이 초범인 점, 재시공으로 피해가 상당 부분 회복된 점 등을 고려해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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