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적게는 원고지 4매, 많게는 10매 이상 쓴다. 1매엔 200자가 들어가니 10매면 2,000자, 낱말로 치면 약 500개다. 그러나 내가 하루에 하는 말의 양은 잴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문장 혹은 문장이 되지 못한 낱말을 내뱉을까. 그중 쓸모 있는 말은 얼마나 될까. 다정한 말은 얼마나 차지할까. 난 몇 년 사이 평생 할 다정한 말을 모두 하고 있다.
내가 가장 다정한 말을 건네는 사람은 나의 아이다. 매일 사랑을 고백하기 바쁘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세상에서 가장 예쁜 말을 수집해 들려주는 몫은 나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위한 그림책과 동시를 읽어주고, 의도적으로 대화에 의성어와 의태어를 섞어 쓴다. 그렇다고 아이와의 시간이 매 순간 다정한 건 아니다. 때론 얼굴도 찌푸리고 큰 목소리도 나고 순간 조절하지 못한 감정과 기분이 말로 튀어나온다. 매일 반복해야 하는 일을 가장 싫어하는 나에게 육아는, 반복 그 이상의 것이므로.
그런데 아이는 말보다 먼저 마음으로 말하는 능력을 배웠나 보다. 알려준 적 없는 예쁜 마음을 말한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아이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이미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은 이 능력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것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뜨겁게 뜬 날, 아이는 미끄럼틀을 수없이 반복해 탔다. 마치 밤새 오르고 내릴 기세였다. “엄마 나랑 같이 타” 햇볕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엄만 안 탈래”라며 벤치에 걸터앉는다. “왜?” “재미없어.” “왜?” 계속 재밌다며 같이 타자는 아이에게 “무서워서 안 타. 타기 싫어. 너 혼자 타면 되잖아.” 끝없는 실랑이를 그만두고 싶어 뾰족한 말을 뱉는다. 날 노려보며 떼를 쓸 줄 알았던 아이는 쓰윽 내 곁에 오더니 손을 잡는다. “엄마 무서우면 내 손 잡아. 손잡으면 용기 나.” 내 뾰족한 말은 금세 동그래졌고 마음마저 둥그레진다.
그러나 둥그레진 마음은 자꾸 또 뾰족해진다.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던 찰나 아이는 “장난감 갖다 줘. 내 장난감!” 발을 동동 구른다. “네가 가져와, 네 장난감이잖아.” “싫어. 깜깜해서 싫어.” 난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아이는 어느새 따라와 내 뒤에 서서 “힘내라, 힘내라” 한다. 맙소사, 맙소사. 이번에도 아이의 말에 나의 뾰족함은 한순간에 동그래진다. 내가 장난감을 집다가 떨어뜨리니 “할 수 있어!”라며 작은 주먹을 꼭 쥔다. 그러곤 다시 방으로 통통통 뛰어 침대에 올라가 “엄마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아이. 나의 투덜거림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만 있다. 나보다 말도 마음도 한발 앞선 아이다. 아이 때문에 나는 자꾸자꾸 둥그레져 간다. 작고 모난 날 선 일상에서 말들도 다정해져 간다.
프랑스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보다 차라리 침묵하는 게 관계에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난 마음이 말을 하게 하지만, 반대로 말이 마음을 만들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일부러라도 다정한 말을 해보자. 혹시 아는가. 서걱서걱 신산(辛酸)한 마음이 컸던 내가 혹은 당신이 조금은 다독다독 다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는지. 100개의 다정한 말을 한다는 건 100개의 다정한 마음을 가지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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