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사본과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내 주세요. 조만간 ㅇㅇㅇ 회장님으로부터 작은 선물이 있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에게 이런 전화가 온다면? 믿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가뜩이나 사기성 투자 권유부터 보이스피싱까지 판치는 세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난 5월 아버지가 친한 동창회 관계자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이다.
아버지는 어떤 의도로 주는 것인지 동창회에 물어봤지만 '고향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 이유 없이 선물로 돈을 준다고요?” “아버지, 그런 전화 함부로 믿는 거 아니에요.” "몇 푼이나 준다고..." 전화 한 통에 온 집안이 들썩였다. 처음부터 전화 사기를 의심한 가족들은 만약 사실이더라도 의도를 알 수 없어 안 받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무엇보다 수백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징역을 살고 나온 회장님의 이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기업의 회장이 고향 주민과 동창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큰돈을 깜짝 나눠 줬다는 소식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고향 마을 주민들에게는 가구당 2,600만~9,000만 원씩 거주 기간에 따라 5단계로 차등해 지급했고, 초중고교 동창들에게는 5,000만~1억 원을 지급했다는 내용이었다.
살아가며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그저 '고향'이 같다, '학교'가 같다는 이유로 거액의 현금을 받는 경우가 있었던가? 아직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번 일은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지 않을까 싶다. 그 로또 당첨이 현실이 되고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짜 그 큰돈을 줬다고?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을걸. 아니야, 잘한 거야. 독이 될 수 있는 돈일지 모르잖아.' 나눔의 증빙을 위한 자료 제출을 적극 만류한 아들은 졸지에 '불효자'가 됐다.
요즘 간간이 아버지로부터 '깜짝 나눔' 이후 고향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일부의 이야기지만 돈을 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의 사이는 멀어졌고, 돈을 받았어도 거주 기간 등 ‘급’에 따라 차등으로 받은 사람들 사이가 서먹해지는 경우도 생겨났다고 한다. 아버지와 비슷한 이유로 돈을 안 받은 사람은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돈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많이 받은 놈이 마을 공공기금도 더 내는 게 이치에 맞지 않나?" "아니 기부금 내는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는 사소한 논쟁도 왕왕 생긴다고 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몇 구획 차이로 또는 몇 해 차이의 학교 재학 기간으로 차등 지급받은 사람들은 '남보다 조금 받은' 아쉬움을 넘어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은' 억울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50대 재력가인 '기부천사' 회장님의 재산 규모는 1조 원을 훨씬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과정을 통해 재산을 축적했는지, 무슨 이유로 또 어떤 기준으로 '고향의 따뜻한 정'을 계량해 무 자르듯이 나눠 줬는지는 차치하고 그의 '고향 사랑'에는 진심이 있었다고 믿고 싶다. 아버지 역시 회장님과 마찬가지로 평소 고향과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회장님의 의도에 대해 세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회장님의 '선물'이 마냥 훈훈한 미담만 남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뜻밖의 나눔으로 인해 친목의 표면에 생긴 작은 갈등과 균열에서 씁쓸한 여운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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