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회운동가 시절 기획한 '아름다운 가게'를 자주 이용한다. 중고 물품을 사회가 공유하고 나눠 쓰는 것은 자원 재활용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내 삶의 중심에 있던 물건이 다른 누군가 삶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체온을 나누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소셜 디자이너였다.
박 전 시장은 인권 변호사와 NGO 활동가로도 두드러진 삶을 살았다. 그는 1990년대 서울대 조교 사건을 맡아 성희롱의 개념을 최초로 제시해, 역사적 승소를 한 바 있다. 그 덕분에 한국 여성 인권은 진일보했다. 또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오랫동안 맡아 한국 시민운동의 초석을 다진 공로도 크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에도 정책의 공과는 있겠지만, 개발 위주 정책에 제동을 걸고 '도시 재생'이라는 화두를 던진 것은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안타깝게도 성추문 속에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국가인권위원회와 법원이 그의 성비위를 사실로 인정했으나 이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피해 호소인'이라 조롱하던 2차 가해가 한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의 유해는 지난 4월 민주화 성지로 불리는 모란공원으로 옮겨졌다. '도덕적 복권'을 시도한 것이다. 김수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추도사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중상모략"이라 비난해 심각한 2차 가해를 했다. 최근엔 박 전 시장을 옹호하는 다큐 영화 개봉을 둘러싸고 소모적 논란을 벌이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적 권리다. 하지만 그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문화적 가해'라면 문제가 다르다. 박 전 시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하다. 그의 훌륭한 인품에 어떤 균열도 용인하지 않는, '인간 단일 자아' 신화의 신봉자들이다.
단언컨대 세상에 '그럴 사람이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의 자아는 단일하지 않고, 분열적이고 중층적이다. 도덕과 이성을 관장하는 뇌의 신피질은 얇고, 그 아래는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이다. 그래서 늘 어둡고 충동적인 욕망에 시달린다. 그 욕망을 잘 제어하고(혹은 들키지 않고) 성공적으로 자아를 전시하면 '평판'이라는 사회적 자원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주 실수하고 실패한다.
한때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일련의 미투 사건은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의 어두운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대부분 '그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성적 환상을 채우는 이익은 압도적으로 커서 인간은 자주 비정상적 위험을 감수한다. 권력의 위력을 가진 사람은 더 과감해진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이 있었다고 그의 훌륭한 공적 업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생애는 대체로 훌륭했지만 삶의 마지막에 오점을 남겼다. 이를 함께 인정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욕망은 생각보다 훨씬 어둡고 복잡하다. 그래서 늘 위태롭다. 박 전 시장의 실수는 안타깝지만 그 실수를 함께 성찰할 때 사회는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간다. 사실을 뒤집어가면서까지 박 전 시장의 '위인 서사'를 다림질해 매끈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는 이쯤에서 끝내길 바란다. 그럴수록 모두가 구차해진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