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사무관이 교사에게 쓴 편지
"하지 마 등 제지하는 말 '절대' 말라"
한 민간연구소 '왕의 DNA' '극우뇌'
"비검증 교육법 적용은 위험" 경고
초등학생 자녀의 담임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해 직위해제시킨 교육부 5급 사무관이 후임 교사에게 한 황당한 요구가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후임 교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말해 달라"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 같은 내용은 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은 한 민간연구소에서 주장하는 교육법인 것으로 파악됐다.
"왕의 DNA 가진 아이니 제지하는 말 말라"
지난해 교육부 5급 사무관이었던 A씨는 초등학생 자녀를 맡은 교사에게 특별 교육 방침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하지 마, 안 돼, 그만 등 제지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싫다는 음식을 억지로 먹지 않게 합니다 △또래 갈등이 생겼을 때 철저히 편들어 주세요 △지시, 명령투보다는 권유, 부탁의 어조로 사용해주세요 △표현이 강하고 과장되게 표현합니다 △칭찬과 사과에 너무 메말라 있습니다 △회화에는 강점이고 수학은 취약합니다 △인사를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여 강요하지 않도록 합니다 △등교를 거부하는 것은 자유가 허용되자 제일 힘든 것부터 거부하는 현상입니다 등 9가지의 지침이 적혀 있다.
A씨는 각 지침마다 세부설명도 덧붙였다. 예컨대 '위험한 행동 제지가 필요하면 관심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켜 달라',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기 때문에 왕자에게 말하듯이 듣기 좋게 돌려 말해달라', '뇌세포가 활성화될 때까지 쓰기와 수학 등 학습을 강요하는 것은 자제해달라', '극우뇌 아이들의 본성으로 인사하기 싫어하는 것은 위축이 풀리는 현상이다' 등이다.
'극우뇌' 잘 키우면 아인슈타인 된다?
이 편지가 알려지며 온라인상에서는 "기상천외한 요구" "왕의 DNA가 따로 있냐" "도대체 저런 발상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극우뇌가 뭐냐"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A씨의 교육법이 '뇌교육 박사'로 알려진 김의철씨가 운영하는 GG브레인파워연구소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치료법'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다수 제기됐다. 김 소장은 교육 지침서인 '세계적 천재들도 너만큼 산만했단다' '너는 이 세상의 중심이다' 등의 저자다. 그는 자폐와 ADHD가 있는 아이들의 행동 원인이 뇌에 있다고 보고, '극우뇌' 유형의 아이들은 '왕의 DNA'를 갖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교육법을 통해 치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김 소장이 유튜브에 올린 강의 내용을 한국일보가 확인한 결과, A씨가 쓴 편지 내용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그는 '전국 초등학교와 유치원 선생님을 향한 조언'으로 올린 영상 강의에서 "야, 안 돼, 하지마는 금기어"라며 "규칙을 요구하거나 제지하거나 제한하는 말을 하면 맹렬히 반발하고, 반복해서 이야기할 경우엔 선생님이 싫어서 등교를 거부하거나 몇 주 안에 ADHD 현상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맡은 반에 극우뇌 아이가 하나 끼었다면, 스티브 잡스나 아인슈타인이 한 명 들어왔다고 생각하라, 로또의 기회다"며 "천재형 아이들을 잘 키워 국민들의 '큰 바위 얼굴'이 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영상 강의에서 부모들에게 "(자녀를) 왕자나 공주 대접하시고 때리거나 야단치지 마세요"라고 조언했다. 김 소장은 극우뇌 유형 아이들은 스스로 '황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훈육보다 그런 대접을 해주면 영웅심이 채워져 문제 행동이 교정된다고도 주장했다.
예를 들면 공부하기 싫다는 아이에겐 "공부해"라고 말하는 대신 "동궁마마 공부하실 시간이옵니다"고 하면 더 잘 따른다고 했다. 그는 또 아이들에게 △잔소리, 지적질 절대 금지(쉽게 앙심을 품고 오래감) △강압, 명령형 말투 금지 △요청하는 아이에게 "네 여기 있습니다, 공주님" 이렇게 반응하기 등의 교육법을 권장했다.
김 소장은 극우뇌 유형 아이들을 대상으로 '좌뇌보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수십만 원에 달하는 상담비와 진단비를 받고 교육자료 등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소장이 자신의 책에 정리한 극우뇌형 아이의 특징으로 △상스럽고 저주성 욕을 (특히 엄마에게) 자주 한다 △수업시간에 주위 아이들이 자기를 툭 치기만 해도 복수하겠다고 덤빈다 △비난이나 조롱을 몇 배 크게 받아들인다 △고개 숙여 하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다 △감정전환이 대단히 빠르다 △모든 일을 자신이 결정하려고 한다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극우뇌 아이들이 성공한 유명인이 된 예로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미국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애플 창업가 스티브 잡스 등을 들었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도 어릴 때 뇌를 다쳤는데, 돌봐주는 어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빨간뇌 아이들은 공격성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범죄자 교육법" "비검증 교육법 위험" 우려 봇물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면서 온라인상에서는 해당 교육법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한 누리꾼은 "김 소장 교육법으로 효과를 봤다"며 "첫째가 잘못해도 (첫째는 왕자대접을 하고) 동생을 혼내니까 첫째의 분노 발산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한 누리꾼은 "자폐를 약 안 쓰고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아나키즘인가" "범죄자가 되기 좋은 교육법 아닌가" "검증되지 않은 헛소리" 등의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도 우려를 표했다. 학계 등에서 검증되지 않은 교육법은 상술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A씨처럼 자신의 교육철학이나 교육법을 교사에게 강요하는 행위도 문제다. 김금선 하브루타부모교육연구소 소장은 "부모 입장에서 마치 왕자나 공주처럼 아이를 대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교육법을 무리하게 끼워 맞추는 건 매우 위험하다"며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면 교사나 전문가와 상담해서 올바른 훈육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교사 출신이자 한국교총 법률고문을 맡고 있는 전수민 변호사는 "아이를 하나둘만 낳아 기르는 가정이 늘며 자신의 자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가 교사로부터 인권 침해를 받고 있으니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학부모가 늘었다"면서 "학교폭력심의위원회처럼 교권을 보호할 수 있는 위원회를 만들어 학부모의 무리한 요구 등을 걸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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