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벤하이머’는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합친 단어다. 두 영화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무런 접점이 없다. 판타지 코미디인 ‘바비’는 전형적인 바비 인형(마고 로비)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오펜하이머’는 인류 최초 핵폭탄 개발을 이끌었던 미국 천재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그린 전기 영화다. ‘바비’와 ‘오펜하이머’는 지난달 21일 북미에서 나란히 선보였다. 공통점은 개봉일밖에 없는 셈이다.
같은 날 개봉하는 영화는 대립각을 세우기 마련이다. ‘바비’는 워너브러더스 배급작이다. ‘오펜하이머’는 유니버설이 배급했다. ‘오펜하이머’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직전 영화까지 협업했던 워너브러더스와 다툰 후 결별하고선 유니버설과 손잡았다. ‘바비’가 같은 날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런 감독은 대노했다는 후문이다.
미국에서 두 영화는 여름 기대작이었다. 네티즌들은 재미 삼아 ‘바벤하이머’라는 신조어를 만들고 두 영화 포스터를 합성해 온라인에 유포했다. ‘바벤하이머’가 인터넷 현상이 되자 손익계산에 민감한 스튜디오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경쟁은 피하고 공동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이번 여름 2편을 함께 보라는 식으로 협업체제를 구축했다. 두 영화는 북미에서만 매출 7억9,067만 달러를 합작해 냈다. 코로나19 이후 여전히 고전하던 극장 수익을 완연히 회복시켰다는 평이 따른다.
‘바벤하이머’가 성공하자 네티즌들은 놀이하듯 두 영화의 공통점 찾기에 나섰다. 제작과 연출을 부부가 분담해서 했다는 식이다. 미국에서 거론되지 않은 공통분모가 두 영화에는 있다고 본다. ‘사회적 메시지’다.
‘바비’는 인형 바비가 상상 속 공간 바비 랜드에서 살다가 인간 세계를 경험한 후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바비는 가부장제적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한다. 여성주의를 웃음과 더불어 전파하려 한다. ‘오펜하이머’는 역사적 인물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며 한 시대를 돌아본다. 적에 대한 공포가 핵폭탄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낸다는 메시지는 21세기에도 서늘한 교훈을 안긴다. 현재를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흔드는 메시지들이 있었기에 예상 밖 흥행이 가능했다.
올여름 한국 영화들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제작비 200억 원 안팎이 들어간 대작 4편이 지난달 26일부터 1주일 간격으로 선보였으나 ‘대박’이라는 수식과는 거리가 멀다. ‘밀수’(17일 기준 463만 명)만 손익분기점에 다다른 정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231만 명)도 본전을 챙길 가능성이 있으나 ‘비공식작전’(103만 명)과 ‘더 문’(50만 명)은 이미 흥행 실패의 쓴잔을 들이켜고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제외한 3편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메시지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상업영화는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갈수록 이슈를 더 멀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괜스레 논쟁에 휩싸이면 흥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이 작용하는 듯하다. 북파 공작원 논란을 불렀던 ‘실미도’(2003), N포세대의 설움을 소재로 한 ‘엑시트’(2019) 등의 흥행은 옛일에 불과할까. 시대와 호흡하지 않는 영화는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다. 한국 영화 흥행 부진을 비싼 관람료 탓만 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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