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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와 범죄자 사이

입력
2023.09.04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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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예능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몇 개나 될까'하고 세어보다 손가락 발가락을 합친 수보다 많아 세는 것을 포기했다. 포털에서 '범죄예능'을 키워드로 이미지를 검색했다.

범죄예능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몇 개나 될까'하고 세어보다 손가락 발가락을 합친 수보다 많아 세는 것을 포기했다. 포털에서 '범죄예능'을 키워드로 이미지를 검색했다.

주말에 할 일 없이 TV 앞에 앉아 리모컨 버튼을 누르고 있다. 채널을 몇 바퀴 돌리다 보니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이 참 많구나' 생각했다. 게다가 출연자들도 프로그램 이름만 다를 뿐 겹치기 출연이 대부분이다. 범죄 수사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다. 대부분 과거의 흉악 범죄를 재구성하고 출연한 연예인들이 일반인의 시각에서 각종 범죄에 관한 정보를 전문가들에게 배워가는 형태다. 전·현직 형사, 프로파일러들이 전하는 현장 무용담이나 범인의 심리 해석 등이 흥미를 더한다. 사건 자체가 워낙 자극적인 데다 예능으로 재미의 요소를 가미하다 보니 프로그램 몰입도가 높다.

전 국민 트로트 열풍일 때는 채널만 돌리면 트로트가 나오더니 험악한 시대에 범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유사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몇 개나 될까' 하고 세어보다 손가락 발가락을 합친 수보다 많아 세는 것을 포기했다. 시험방송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이 정규로 편성된 후 다시 시즌제로 전환된 경우도 있고 새로 생길 프로그램도 예고되고 있었다. 국내 범죄만으로는 사례가 부족했는지 해외범죄를 전문으로 다루는 방송도 생겼다.

몇 회를 집중해서 보니 영상자료를 통한 '친절한 해석' 덕에 금세 사건명만 봐도 범인의 심리나 동기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저렇게 하니까 잡히지', '증거를 없앴어야지', '내가 범인이라면 말이지...'

처음에는 프로파일러가 되어서 범인을 추리하다가 회차가 지날수록 점점 범인의 심리에 스며들기도 했다. 프로파일러도 범인을 잡기 위해서 범인과 동기화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범죄사건은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 사건이 일어나면 다른 곳으로 전염되어 모방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래살인'을 저지른 정유정 이후 ‘신림 칼부림 사건’, ‘서현역 칼부림 사건’ 그리고 연쇄적으로 예고 범죄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 뚜렷하지 않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벌이는 '이상동기범죄'들이다.

'또래살인' 정씨의 휴대폰을 포렌식한 결과 범죄 소설과 범죄수사프로그램을 통해 잔혹 범죄를 학습한 것이 드러나 놀라움을 주었다. 경찰이 CCTV를 통해 확인한 정씨의 범행 직후 행동은 너무나 태연한 모습이어서 더 간담이 서늘했다. 미디어를 통해 학습하고 수차례 머릿속에서 모의시험해 봤을 정씨는 잔혹범죄를 마치 가벼운 임무수행하듯 해치우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과 뒤섞였다.

미디어가 범죄 바이러스를 옮기는 매개 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클릭장사에 혈안이 돼 보도준칙을 무시하고 자극적으로 범죄를 퍼트린 일부 뉴스·보도 역시 일조하고 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다는 말은 철저히 공급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상상치도 못한 범죄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보니 관련 뉴스·보도, 예능이 많아졌다'는 말의 앞뒤를 바꿔 생각해 본다. '미디어를 통해 쉽게 학습된 범죄방식으로 범죄가 다양하고 잔인하게 진화했다'는 말에 진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실제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추가적 피해를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범죄 예능물의 기획의도를 되새겨 봐야 한다. 인기에만 편승해 흥미와 자극으로 채워진 콘텐츠는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류효진 멀티미디어부장 jsknig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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