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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와 한국의 선택

입력
2023.09.07 0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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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최근 개봉된 영화 오펜하이머는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과학자의 열정과 고뇌, 개인의 사상편력과 정치적 상황이 얽히면서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한 과학자의 인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 관심을 가진 국제정치학자로서 영화를 보며 미국이 최초로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내내 생각해 보았다.

영화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1938년 독일 과학자들에 의해 핵분열이 발견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하면서 많은 국가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위력을 지닌 핵폭탄에 주목하고 이를 먼저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 이외 독일 우라늄클럽, 영국 튜브얼로이, 소련 이고리 쿠르챠토프 중심 핵무기 프로젝트, 일본 니시나 요시오와 리켄연구소의 핵무기 프로젝트가 가동 중이었다.

스파이 소설을 방불케 하는 당시 핵폭탄 개발 경쟁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 보면 미국의 승리가 생각만큼 자명한 것은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핵과 같은 전략기술 개발이 진공상태가 아니라 국제정치적 경쟁의 틀 속에서 진행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승패가 갈리지만 결국 인력, 자본, 비전의 트리니티가 중요했다고 생각된다. 당시 연구인력 측면에서 가장 우수한 풀을 확보한 국가는 독일이었지만 유대인 탄압과 과학자 전쟁 동원으로 많은 인력들이 독일을 떠났다. 방대한 시장과 제조업 중심지로 경제 상승기에 있었던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대규모 자본을 안정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는 독일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 명분을 찾기 어려웠고, 영국 역시 핵무기와 자국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연결하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일본도 전쟁에서 지지 않는다는 명분이 비전의 전부였다. 미국은 부상하는 패권국가로서 평화를 위협하는 침입자들을 패퇴시키고 국제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이들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평화와 패권을 결합한 비전을 내세우며 과학자들을 설득하였다.

현재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분야에서 국가 간 기술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강력하게 견제하는 가장 밑바닥에 깔린 동기는 결국 신무기 개발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가 활용된 무기의 파괴력은 핵무기의 위력만큼 즉각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게임체인저가 될 것인지도 더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나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핵무기 개발 무대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의 이번 라운드 무대에는 한발 깊숙이 들여놓고 있는 상황이다. 핵무기에 이은 이번 라운드 전략기술 경쟁에서도 역시 인력 자본 비전의 트리니티가 중요하다면 현재 우리에게 가장 부족하고 필요한 것은 비전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인력이나 자본도 미국 중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따라잡기 거의 불가능하다.

인력과 자본의 부족을 보완하고 끌어올리는 데 비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미중 경쟁시대 한국이 세계정치에서 중견국으로서 어떤 비전을 내세울 수 있는지,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 기술은 우리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력을 가진 큰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우리의 중요한 외교자산인 기술력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세부전략들이 이런 큰 그림과 결합될 때 보다 힘 있게 추진될 수 있고 우리가 무대의 중요한 행위자로 올라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배영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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