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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법이 정한 범위의 고위 공직자 등은 직무관련성이 있는 3,000만 원 이상의 주식을 매각하거나, 금융회사에 알아서 처분하도록 맡겨야 한다. 정책이 사익추구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조치이며, 이런 백지신탁 제도는 2005년 국내 도입됐다. 그런데 요즘 주식 백지신탁을 거부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소송까지 하며 버티는 것은 과거에 볼 수 없던 풍경이다.
□ 주인공은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과 박성근 국무총리 비서실장. 유 사무총장은 배우자의 바이오 회사 지분, 박 비서실장은 배우자의 서희건설 지분의 처분을 거부하고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유 총장은 “집사람도 헌법상 재산권을 가지고 있다”며 “간접적으로도 (감사원이 해당 회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박 실장도 “배우자의 인격권과 자기계발권, 가업승계권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박 실장의 배우자는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의 장녀이다.
□ 고위 공직자라고 무조건 주식을 처분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가 직무관련성을 판단해서 결정한다. 총리실은 대통령실처럼 각 분야 정책을 포괄적으로 담당하고, 감사원 또한 감사 범위가 광범위하다. 관련 회사들과 연관된 총리실 정책이나 감사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두 사람의 입장이 쉽게 공감이 안 되는 이유이다.
□ 백지신탁은 1978년 미국에서 처음 법제화됐다. 법제화 전에도, 석유재벌 가문의 넬슨 록펠러가 1974년 미 부통령이 되면서 자발적으로 당시 1억1,600만 달러에 이르는 주식을 신탁회사에 알아서 처분하도록 백지신탁했다. 이와 대비해 보자면 백지신탁을 거부하는 두 공직자의 자세는 씁쓸하다. 박근혜 정부 때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이 문제로 중소기업청장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문재인 정부 때는 인재 구하기의 어려움을 이유로 제도 손질을 하려 했으나 비판 여론을 넘지 못했다. 고위 공직자는 권력과 ‘코드’를 같이 하는 자리이다. 결국 백지신탁 거부 공직자들의 등장은 이를 용인하는 권력이 등장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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