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물리적 힘을 가하거나 공포심을 일으켜 추행을 했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한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기존 판례를 40년 만에 변경한 것이다. ‘저항 유무’의 기계적 판단을 넘어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 의미 있는 판결을 환영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그제 성폭력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14년 미성년자였던 사촌동생에게 “만져줄 수 있냐” “안아줄 수 있냐”며 자신의 신체부위를 만지게 하는 등 강제 추행했다. 징역 3년을 선고한 1심과 달리 2심은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다. A씨 발언이나 물리적 힘이 피해자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을 수준이 아니라고 봤다.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추행했을 때 성립하는 범죄다. 대법원이 1983년 제시한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는 기준이 40년간 유지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불법한 힘(유형력)을 행사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해 추행한 경우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새 판례를 내놨다. 기존 판례에 대해서는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최근 물리적 폭력보다 그루밍이나 회유를 통한 성폭력 사건이 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피해자의 필사적 저항이 죄의 성립요건이니 처벌의 공백이 상당했다. 이번 판례 변경으로 그 공백을 상당 부분 메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참에 비동의 강간 및 추행죄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사건 주심인 노정희 대법관도 보충의견에서 밝혔듯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내에선 아직 찬반 논란이 거세다. 일방 주장만으로 처벌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여성가족부가 올 초 도입을 밝혔다가 8시간 만에 번복하는 해프닝이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좀 더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를 쌓은 후 도입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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