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지난 1일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육상 100m 허들에서 금메달을 딴 중국 린위에이 선수가 2위로 들어온 자국 선수와 포옹하는 사진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감동적 동료애 때문이 아니라, 그 사진을 중국 국영 CCTV가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가 삭제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공교롭게도 두 선수가 각각 허리춤에 달고 있는 참가 번호 6과 4가 도드라져 보인다. 언론들은 “중국 정부가 1989년 6월 4일 일어난 베이징 톈안먼 민주화 시위를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 톈안먼 시위를 무력 진압한 중국 정부는 이 시위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로 여긴다. 반면 홍콩 대만에서는 매년 6월 4일 오후 6시 4분에 촛불을 들며 기념하고 있다. 톈안먼 시위 기억을 둘러싼 경쟁에서 중국이 결코 대만과 홍콩을 이길 수 없다. 인간의 뇌는 ‘어떤 생각을 하지 말 것’이란 지시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이 ‘6·4’가 보이는 사진을 삭제하자, 오히려 전 세계가 34년 전 톈안먼 시위를 기억하게 됐다.
□ 원숭이에게 어떤 물체를 집지 말도록 훈련하면, 그 지시를 따르면서도 그 물체를 집을 때 사용하는 뇌의 뉴런은 여전히 활동한다. 특정 물체를 집지 않으려면 그 물체를 집는 일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게임하지 마라’ ‘술 담배 하지 마라’는 잔소리가 별 효과가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권력자들은 종종 국민들의 생각을 금지하려는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지만, 결국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국방부가 최근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동상을 치우겠다고 발표하자, 느닷없이 4년 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의 OTT 조회수가 증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73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퇴 위기에 몰리자, TV에 나와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호소했지만, 그 순간 온 국민은 ‘사기꾼’이란 단어만 기억했다. 최근 전직 대통령들도 재임 시 정책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이 역시 의도한 결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