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소비자한테 돈 받고 팔면서 불량품을 내놓는 게 미안하지도 않냐.”
1993년 6월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 200여 명에게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그는 “취임 후 6년간 계속해서 ‘불량 안 된다’고 떠들었는데도 아직도 질보다 양을 고집한다”며 호통쳤다. 이어 “지금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가 될 것”이라며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한번 바꿔 보자고, 다 뒤엎어보자”고 주문했다. 신경영 선언이다. 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15만 대의 애니콜 화형식을 연 것도 이런 충격 요법의 일환이었다.
□ 그러나 조직을 변화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감지됐다. 이 회장은 93년 7월 오사카 회의에서 “바뀌고 싶은 사람만 바뀌어라, 기다리겠다, 개인마다 다른 것 인정한다, 그러나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마라”고 경고했다. 그의 ‘뒷다리론’은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도 먹여 살린다는 ‘인재론’과도 연결된다. 이 회장은 “달릴 사람은 달리고 쉬었다 갈 사람은 쉬어라, 안 자르고 월급도 주겠다, 대신 다른 사람의 뒷다리는 잡지 마라”고 거듭 역설했다.
□ 그렇다고 천재만 중시한 건 아니다. 이 회장은 일류가 돼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인류를 위해서, 한국을 위해서, 삼성 임직원 가족과 자손을 위해서 영원히 잘살자고 하는 것”이라며 ‘다 같이 더불어 잘사는 지혜’를 강조했다.
□ 사실 우리 사회 일각엔 남이 잘되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없잖다. 삼류 제도가 일류 혁신의 발목을 잡는 일도 허다하다. 변화를 시도하는 곳엔 시기와 질투, 음해와 험담이 난무한다. 똑똑한 머리를 남의 뒷다리를 잡거나 방해하는 데 쓰는 이들도 적잖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창의성과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 결과는 ‘다 함께 못 사는 길’이다. 한국에서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 같은 이가 성장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30년 전 위기와 변화를 외친 선구자의 혜안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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