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음악과 춤은 오랜 시간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역사를 공유해 왔다. 수많은 클래식 작품이 춤곡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안무가와 무용가들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춤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 음악을 즐기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무용 공연을 보는 것이다.
프랑스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가 창단한 모리스 베자르 발레단의 공연으로 라벨의 '볼레로'를 '본' 사람은 '볼레로'의 음악적 힘과 역동성을 더 크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역시 베자르가 안무한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공연을 보게 되면 말러 음악에서 색다른 상상력을 자극받게 된다. 스페인 출신 안무가 나초 두아토가 바흐의 음악 23곡을 선정해 만든 작품 '멀티플리시티'는 바흐의 음악과 인생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다 선명하게 감상하게 된다. 지휘자 윌리엄 크리스티와 시대악기 앙상블 레자르 플로리상은 무용수들과 함께 내한한 2017년 무대에서 라모의 오페라 '매트르 아 당세'를 통해 춤곡으로 구성된 바로크 음악의 근원적 매력을 실감 나게 보여줬다.
춤은 낯선 음악도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K팝에 관심 갖게 된 해외 팬들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춤의 매력에 먼저 시선을 빼앗겼다. 다소 어렵게 들렸던 음악도, 무용수의 멋진 동작과 연출의 효과가 더해지면 음악에 대한 호감도가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음악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음악을 사용한 무용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다. 현대음악 작곡가 막스 리히터의 음악은 콘서트홀보다 영국 로열발레단과 같은 유명 무용단의 공연에서 더 많이 연주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용단은 새 작품 구상을 위해 리히터를 비롯한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곡을 의뢰하곤 한다. 따라서 어쩌면 무용 애호가들은 일반적인 음악 애호가들보다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에 더 노출됐을 수도 있다. 적어도 차이콥스키와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은 더 많이 들었을 것이고, 무용수라면 그들의 음악 전체는 물론 세부 악상까지 다 꿰고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음악이 평범하지 않을수록 춤의 매력은 배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차이콥스키는 춤을 위해 존재했던 발레음악을 춤보다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 초연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악평은 '음악이 지나치게 좋아 발레가 시선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낯선 구석 없이 편하게 들리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 대단히 감미롭다. 그런데 그 음악이 춤으로 구현될 때는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다. 심지어 그 우아함을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 무용수들에게는 더 좋은 기량과 많은 힘을 요함에도 말이다.
반면 스트라빈스키처럼 듣기에 다소 불편하고 선율 내에서도 변화가 많은 음악은, 그 변화를 몸으로 표현해야 할 때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아진다. 보다 역동적이고 스피디한 움직임이 만들어지는데 관객은 예측을 비껴 나가는 움직임 가운데에 절묘한 앙상블을 이뤄 내는 무대에 더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낯선 음악에서 퍼포먼스의 효과를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며칠 전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설레는 마음으로 감상했다. 장 크리스토프 마요의 연출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52개 전곡을 발레와 함께 들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오페라나 발레는 준비 기간도 길고 출연진이나 예산도 많이 필요해 자주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이에 프로코피예프는 발레 음악의 소재를 차용한 관현악 모음곡을 따로 만들었는데, 원곡을 발췌한 데 그친 것이 아닌 별도의 제목을 붙여 유기적 흐름을 갖는 콘서트용 레퍼토리를 만든 것이다. 콘서트홀에서 듣는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도 좋지만 멋진 연출과 함께 춤이 더해질 때의 깊이와 감동은 다른 차원으로 전환된다.
안무가 안성수가 국립현대무용단 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작품 목록은 대단히 특별했다. 한국음악과 한국무용에 기초한 작품은 물론 국악, 동시대 대중음악과 춤을 혼재한 작품, 여기에 세 명의 안무가와 젊은 작곡가가 라벨의 '볼레로'를 해체하고 재해석해 만든 '스리 볼레로', 스트라빈스키의 세 개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스리 스트라빈스키', 시벨리우스의 '투오넬라의 백조'로 안무를 만든 동명의 작품 등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의 발걸음을 끌어당겼고 눈과 귀까지 사로잡았다.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모두에게 축복이었던 것이다.
음악은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안무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춤은 음악의 감동을 확장시킨다. 음악과 춤은 지금도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춤 덕분에 음악이 더 특별해지고, 음악 덕분에 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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